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경덕 (문단 편집) == 기타 == *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이 있다. 이지함 또한 농업과 상업의 병진론을 주장하는 등 당시 사상가 중에서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서경덕 유파가 이어지지 못한데 아쉬움을 보이는 [[학자]]도 있다. 그 외에도 [[박순(조선)|박순]][* 문하에서 가장 명성이 있었던 인물. [[이황]]과 [[조식(조선)|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 서경덕 학파 특유의 독자 연구도 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서인 강경파], [[허엽]][* 스승의 영향인지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까인다. 동인 강경파], 박지화[* 서얼 출신], [[양사언]], 한백겸[* [[이항복]], [[정경세]]의 친구로 조선 [[주역]] 연구의 1인자.] 등이 있다. * 성리학자였지만 노장 사상과 불교에 대한 이해 또한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에 대한 비판 또한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후대에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철학자가 아닌 [[도사]] 이미지로 자주 각색이 되어서 [[전우치]] 설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 민담 소설이나 기담에 노장 사상이나 선술(仙術)의 대가로 엄청난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도사로 등장한다. 설화 전우치전에서는 도술만 믿고 깽판치고 다니던 전우치를 굴복시켜서 선계로 데려가는 등 전우치의 뒷수습을 주로 맡는다.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마 그의 비주류적 사상 경향이 그의 제자 이지함과 함께 그를 민중의 영웅, 신비적 인물로 승화시킨 듯. * 종달새 일화처럼 [[공부]] 방법이 현재의 [[명문대]] 공부법과 유사했다. 전해지는 방법으로는 단어를 방 안에 써 붙여 놓고 그 단어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근본부터 사색을 하거나 고전들을 뒤져보며 탐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해 검증하고 확인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색적인 성향은 <상서>를 공부할 때 훈장이 그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훈장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해서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래서 뒷날 추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선조(조선)|선조]]가 "이 사람 공부는 수신(修身)이 없으니 의심스러운데?"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율곡 [[이이(조선)|이이]]는 서경덕의 공부법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며 서경덕이 [[우의정]]에 추증되는데 역할을 했다.[* 물론 서경덕의 후학은 이 평도 마음에 안 들어했다. 이건 조식이나 [[이황]] 후학들도 마찬가지.] >"그의 공부법을 꼭 본받을 것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아서''' 문자로만 익히고 말 학문은 아닙니다. 요즘 학자들은 성현의 학설을 모방해 말할 뿐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 [[개성시|개성]]의 빼어난 3가지)'로도 유명하다.[* 근데 송도 삼절은 황진이 자칭이라 실제로 저 셋이 세트로 묶여 칭송받았는지는 애매하다.] * [[야사(역사)|야사]] 한정으로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녀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유혹을 자세히 묘사한 이야기들도 자주 보이는데 이런 곳에 등장하는 서경덕의 모습은 [[목석]]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황진이에게 10년(혹은 30년) 수행을 날려먹은 지족 선사[* 여기서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이 있다.]와 비교되어서 '비인간적이다'라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까이는 수준이다. 이런 서경덕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지간히 문제가 있었는지 사실은 시문을 통해 황진이를 그리워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고 [[2차 창작|겉으로만 그러는 척 했지 실제로는 할거 다 했을 거라고]] 억지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야사이므로 황진이를 만났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youtube(duwfzYh-_Kw)] * 평생 벼슬하지 않고 독창적인 주기 철학을 수립하였다. * [[서남수]] [[교육부장관]]이 [[서(성씨)|당성 서씨]](唐城 徐氏)로, 서경덕의 후손이다.[[https://m.munhwa.com/mnews/view.html?no=2013051001073027015004|2013년 5월 10일 문화일보 기사]] [[실향민]]이던 부모님의 고향이 서경덕이 살았던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現 [[개성시]] 용흥동)이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