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샹중파 (문단 편집) === 중국 공산당 지도자 === 1928년 7월,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제6차 중앙위원회 제1기본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샹중파는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코민테른은 [[취추바이]]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직에서 제외시켰고, 그 자리를 소련 유학파 및 친소 인사들로 채웠다. 7월 19일, 샹중파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28년 9월 2일, 샹중파는 상하이로 돌아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업무를 관장했다. 이후 그는 당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실제로 실무를 담당하는 이는 [[저우언라이]]였다. 아무리 그가 소련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해도, 역시 가방끈이 짧은 걸 만회하긴 힘들었기에 그 자신만의 이론을 갖추지 못했고 리리싼과 저우언라이의 이론을 무조건 따랐다. 그러나 1930년 [[창사 폭동]]이 실패하면서, 리리싼은 실각 위기에직면했다.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제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스탈린은 리리싼의 노선을 비판했다. 리리싼이 자아비판 후 재교육을 위해 소련으로 간 뒤, 스탈린은 파벨 미프와 [[왕밍]]을 파견해 리리싼 노선을 전면 폐기하게 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11월 말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해 리리싼의 퇴진을 결의했다. 샹중파는 파벨 미프와 왕밍이 득세하고 리리싼의 추종자들이 대거 숙청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왕밍 등은 그가 계속 공산 지도자로 남는 걸 허용했지만 실권은 자신들이 독점했고, 샹중파는 왕밍 노선을 무조건 추종하며 과거 리리싼을 추종한 것에 대해 "내가 이론이 부족해 리리싼이 잘못했을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고 그와 변론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후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코민테른 극동국에 사업 보고를 하고 중앙정치국 회의 또는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뿐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주석이 되도록 조치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훗날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