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오완창 (문단 편집) == 설명 == 원래는 외교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말레이시아]] 주재 [[중화민국]] 총영사관 근무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외교관|상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보니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국제연합]]에서 축출하는 장면도 경험했다.(...) 대만이 [[UN]]에서 쫓겨난 이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지역 과장으로 전임되었다. 1972년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 연수를 다녀온 후, 경제부로 전보되어 통상 관련 업무를 전담하였다. 1982년부터 6년간 경제부 국제무역국장을 지냈으며, 1988년 사직하고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정계입문 초기에는 국민당 중앙위원과 조직부 주임위원을 맡았으나 그의 관료경험을 주목해 온 [[리덩후이]] [[총통]]과 [[하오보춘]] 행정원장은 1990년 그를 대만 경제부장[*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대만은 재정부가 한국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경제부는 통상부처다.) 장관]으로 임명한다. 1993년 [[롄잔]] 행정원장은 그를 행정원 경제건설위원회의 주임위원으로 임명하였고, 1994년에는 행정원 대륙위원회의 주임위원[* 한국의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정계입문 이후에도 의도치 않게 관료역할을 했던 그는 1996년 [[국회의원|입법위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자신의 고향인 자이시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는가 싶었지만 1997년 [[리덩후이]] 총통은 그를 [[국무총리|행정원장]]으로 임명함으로써 관료의 수장이 되었다(.....) 1999년 대만 총통선거 국민당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부총통이었던 [[롄잔]]에게 밀려 낙선하였으나, 롄잔이 그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2000년 대선에서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당 경선에 불복한 전 대만성 성장 출신의 [[쑹추위]]가 국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국민당 지지가 절반으로 찢어졌으며 결국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당선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당의 [[롄잔]]-샤오완창 조는 3위에 그쳤다. 그 이후, 2005년까지 국민당의 부주석직을 역임하였으며 2008년 대선에서 [[마잉주]]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받아 부총통 후보가 되었다. 경제이슈를 중점적으로 내세웠던 2008년 마잉주에게 샤오완창의 경제관료로서의 경험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경제적으로 유능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마잉주가 당선이 됨에 따라 부총통이 된 그는 "양안공동시장 기금회"의 이사장을 맡았으며 2008년 4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겸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만나기도 하였다. 2011년 그는 다음 선거에 부총통으로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2012년 대선에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지 않았으며, 차기 부총통 후보로 [[우둔이]] 행정원장이 지명되었다. [[마잉주]] 총통은 2013년에 다시 그를 [[APEC]] 대만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2015년까지 역임 후 현재는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