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새정치국민회의 (문단 편집) === 창당 ===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자신의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탈당한 뒤 창당한 정당으로서, 창당과 동시에 동교동계('내외문제 연구회(최대 57석)')를 중심으로 원내 의석 53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됨으로써, 정계는 1여 3야(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1995년)]])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PK를 기반으로 하던 비주류([[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 총재가 이끌고 있었다. 이기택 총재는 김대중 전 총재는 2번 떨어졌기에 1997년 대선은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도 마뜩해 하지 않았다.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고 김대중을 묵묵히 도운 입장에선 당연했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5년 첫 민선 지방선거로 확인 한 것은 DJ의 귀환과 JP의 부활이었으며, 특히 김대중이 공천한 [[조순]]이 당선되고 자신이 공천한 [[장경우]]와 [[노무현]]이 낙선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미 지선 공천 과정에서도 이기택 총재는 막후 실력자 격인 김대중과 여러차례 갈등했다. 김대중 입장에서도 다음해 총선 공천권을 놓고 '실력행사'는 가능했겠지만, 이미 경기도 지사 공천 과정에서도 각목사태가 벌어지는 등 큰 잡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역사가 있는 마포당사까지 남겨두고 탈당을 불사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1995년 7월 28일 당 대변인은 신당의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김대중은 "당(黨)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예로 인도의 국민회의가 있다"고 말하는 등 국민회의 라는 명칭에 애착을 보였으며, [[유신정권]] 시기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언급된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가 이끌던 중도 민족주의 정당이다. 당 관계자는 "국민회의라는 명칭은 여러 의견을 포용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이미지를 주고, 당이라는 명칭보다 민주적이고 국민적인 이미지를 주기때문에 선택했다"고 설명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72800239105011|신당 명칭 「새정치국민회의」로]] 김영삼의 [[신한국당|"신"한국당]], [[1992년]] 대선에서의 "'한국병'의 치료사"라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새"라는 조어를 붙인 정당. 일단 [[평화민주당]]의 분위기를 빼는데는 성공했다는 평이 당시에 있었다.[* 평화민주당은 서울과 호남에 너무 치우친 까닭에 지역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짙었다.] 국민회의는 [[대통령 중심제]](= [[의원 내각제]] 반대)와 [[중소기업]]의 육성, [[여성가족부|여성부]] 신설, [[국가보안법]]의 민주질서보호법으로의 대체, [[남북연합]][[남북통일|통일]]방안 등을 강령으로 삼고, [[중산층]]과 서민 대중을 위한 국민정당을 표방하면서, 중산층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노선을 채택하였다. 동시에 이는 1990년대 후반 대두된 [[영국]] [[노동당(영국)|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 민주당]]의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빌 클린턴]]의 "신진보주의(신개혁주의)" 노선(소위 [[제3의 길]])의 수용이기도 했다. 대놓고 비례대표 1번을 사학 재단 이사장으로 했을 정도. 같은 시기 [[신한국당]]은 개혁을 앞세우며 혁신공천을 내세웠다. 사실 이때는 양당이 모두 중도화 되었던 시기.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으며, 반대 급부로 양 진영 모두 비주류가 선명 노선을 주창하면서 갈라져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보수계는 공화계와 민정계가 김종필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고, 민주계는 잔류파가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으로 남았다. 이들은 각각 원조보수론과 선명야당론을 내세워서 지지를 얻으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몇 년 뒤 대선 국면에서 상대 진영과 손을 맞잡게 된다.[* 통합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을 창당했고, 자민련은 [[DJP연합]]으로 연립정부의 일원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