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민중 (문단 편집) === 태종 재위기 === 상민중은 [[태종(송)|태종]] 재위기인 980년 진사에 급제하여 장작감승(將作監丞)·길주통판(吉州通判)으로 임관했고 우찬선대부(右讚善大夫)로 전임되었다. 전운사(轉運使) 장제현이 상민중의 재능을 천거하여 조정으로 복귀한 뒤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되었다. 태종이 상민중을 편전에서 소견할 때 상민중은 유창하게 대답하여 태종이 상민중을 아끼며 호부추관(戶部推官)으로 삼하고 회남전운부사(淮南轉運副使)로 전출시켰다. 상민중이 부임하기 이전에 지방의 재무를 맡은 관리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과 총애를 믿고 스스로 높은 사람인 체를 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는데, 상민중은 속관들을 예우하며 부지런히 근면하였고 인재 선발에 힘썼다. 한편 어떤 이가 상민중의 군사적 재능을 추천하자, 태종은 상민중을 소견하여 장차 제사부사(諸司副使)로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민중은 간곡히 사양하며 자신이 쓴 글을 태종에게 바쳐 직사관(直史館)이 더해지고 회남으로 돌아가 직무를 맡았다. 그리고 태종이 적전을 간 뒤 상민중은 품계를 뛰어넘어 좌사간(左司諫)이 되었으며, 입조하여 호부판관(戶部判官),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판대리시사(判大理寺事)를 임시로 맡았다. 991년, 감찰어사(監察御史) 조길(祖吉)이 이전에 지진주(知晋州)를 맡았을 때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되었다. 뒤에 조길의 뇌물을 몰수하여 법을 집행한 관리들에게 나눠줄 때 상민중은 종리의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진주를 받지 않은 고사를 인용하며 홀로 받지 않았다. 뒤에 여승 도안(道安)의 사건에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 [[장거화]]가 연루되었는데, 장거화는 상민중의 장인이었기에 상민중은 자신이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판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관들이 모두 폄관될 때 상민중은 오히려 친척이 연루되었기에 파직되어 지광주(知廣州)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광주로 부임하기 직전 상민중은 해당 사실을 태종에게 보고했으며, 태종은 상민중의 말에 감동하여 3년이 안 되어 상민중을 다시 조정에 부르기로 약조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으로 임명되어 광주로 부임하였다. 상민중이 부임한 광주는 상선을 관리하는 사무도 맡고 있었는데, 상민중 이전의 전임자들은 모두 이를 비난했다. 상민중은 광주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약품을 구비하여 광주로 향했고 광주에 재임하면서 요구하는 바가 없이 청렴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뒤에 상민중은 광남동로전운사(廣南東路轉運使)로 발탁되고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 임명되었으며, 태종은 비백서에 상민중과 장영의 이름을 넣어 중서성에 교부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두 사람은 명신이니 짐이 장차 이 두 사람을 임용하겠노라. 태종의 측근 신하들 또한 상민중의 재능을 칭찬하여 상민중과 장영은 모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 임명되었다. 지도(至道) 연간에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