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나라 (문단 편집) == 상대의 기술과 문화 == ||[[파일:attachment/vasefromShangdynasty.jpg|width=200]]|| || 상대의 청동 항아리 ||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사흉]] 중 하나인 [[상상의 동물]].]이 아로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는 [[주나라]] 때 [[서아시아]]를 통해 유입되었다.] 이 시기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느라 애를 먹는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케임브리지 중국고대사 선진편에 따르면 대략 네다섯 개 정도의 구분이 존재한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기술이 후퇴해서가 아니라 청동기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나라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새겼음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는 오히려 주나라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 [[기와]]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함은 둘째 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잦아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문명에도 있던 풍습으로, 이 때문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인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때 건축물들이 어땠냐 하면... ||[[파일:external/2.bp.blogspot.com/fig+x+shang+dynasty+building+n.jpg]]||[[파일:external/www.sott.net/china_huanbei.jpg]]|| ||[[http://www.historyforkids.org/learn/china/architecture/shangarchitecture.htm|다른 링크]]||이게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바로 당시의 [[궁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inxu.jpg]]||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제]](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는 혈통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帝) 신앙은 상나라의 멸망 후에도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유지가 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에서는 위대한(皇) 상제(上帝)라는 뜻의 황제(皇帝)가 등장했고 진나라 멸망 후 전한과 후한 시기에 발흥한 도교신앙과 결합이 되어 도교의 최고 신인 옥황상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16세기때는 외부 종교와 결합을 했는데 바로 기독교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신을 중국어로 표현하기 위해 신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수집을 했고, 결국에는 상제라는 단어가 중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서 상제로 번역을 해 이후 천주 외에는 어떠한 단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교황의 칙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선교에서 폭넓게 쓰였다. 천제께 제사 지내는 제례는 천자의 특권이었으며 때문에 상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주나라를 비롯한 당시의 인식이 아직은 모든 면에서 상왕실의 후예를 함부로 할 수 없었고 그들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후 송나라에서 상왕실의 후손인 공자의 부친이 자성 송씨에서 자성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는데 [[공자]]는 상나라 왕실 종친이며 죽기 직전까지 상나라 왕족 후예인 것을 밝히며 상왕실 전통방식으로 장례할것을 유언했다. 그 말대로 공자의 조상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의 둘째 형인 미중(微仲) 연(衍)이다. 공자는 미중 연의 15세손(=14대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