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나라 (문단 편집) == 하상주 삼대의 관계 == 중국 학계에서는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 유적으로 추정하긴 하나 아직 확실한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하고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 중국 청동기 시대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이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부연하자면 춘추 시대까지도 하나라의 후손은 기나라, 은나라의 후손은 송나라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 논어의 유명한 "하나라의 예법은 기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으며 송나라의 예법은 은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가 유명한데. 중국의 고대사 학계에서도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한다.] 우선 하와 상의 관계를 보면 갑골문에는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하왕조 같은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 夏라는 글자는 보이지도 않고, 갑골문에서는 1년을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또한 후기 하나라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와 초기 상나라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가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하-상의 교체는 상-주의 교체와 달리 지배층 내부의 계승분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반면 상과 주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다. 위치가 낙수, 황하, 제수 사이로 비슷한 하-상과 달리 주의 근거지는 관중지방이다. 또 주나라가 승리한 후 산동 지역에 친척을 분봉하고 강족을 이주시켜 토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다. 문화 면에서도 제사 대상은 제→천으로 바뀌고 점을 치는 방법은 동물뼈→나뭇가지로 변화했는데 문화가 큰 변화가 없는 하-상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 시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는 고공단보 대에 융적을 피해 기산 아래에 정착한다. 그 후 서방에서 인심을 얻으며 세력이 점차 성장하고 초기에는 상나라와 대립했으나 점차 상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상나라는 주나라의 근거지인 기산, 풍경, 호경이 있는 관중 지방은 상나라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고 주나라의 세력도 강력했기 때문에 상나라의 복사를 보면 주나라를 정벌할까요? 같은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나라를 경계했다. 주문왕의 아버지 왕계(계력)이 상왕 문정에게 감금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문왕이 상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나라는 주나라가 일단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제 통수칠지 모른다고 여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주나라 희성은 강성이랑 통혼하는 관계였다. [[고공단보]]의 아내이자 계력의 어머니는 태강이었고 주무왕의 아내는 읍강이었고 훗날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내친 신나라 출신 왕비 또한 신나라가 강성 제후이기 때문에 강성이다. 그런데 주나라 세력이 강해지면서 다른 성이랑 통혼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주문왕의 어머니는 임(任)성, 아내는 사(姒)성이었다. 주역의 효사를 보면 상나라 주왕의 아버지 제을이 주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감금한 것도 주나라 견제의 일환으로 보인다. 상왕 문정이 계력을 감금해 죽였지만 계력의 아들인 서백 창, 즉 주문왕 대가 되면 상나라의 근거지와 가까운 우, 예, 숭 등을 정벌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졌다. 제신이 서백을 유리에 감금하면서 계속 견제는 했지만 결국 서백 창의 아들인 주무왕 대에 주나라를 수장으로 강(羌), 용(庸), 촉(蜀), 무(髳), 노(盧), 팽(彭), 복(濮) 등 서쪽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목야에서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 주나라가 패권을 쟁취하긴 했지만 상나라 유민인 [[상족]](商族) 세력은 여전히 강했는데 주나라가 [[상족]](商族)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주공단]], [[미자계]], [[송나라]] 문서 참조. 문화 면에서 주나라와 상나라는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고공단보 시절이면 몰라도 상나라와 한판 붙은 주무왕 시절의 유물을 보면 상나라와 대동소이하다. 꾸준히 상나라와 교류하면서 문화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또한 상나라처럼 동물 뼈로 점을 친 흔적이 있는데, 민족의 기원은 달랐을 수 있어도 상주교체기 무렵에는 문화가 비슷해진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