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나라 (문단 편집) == 국가 구조 == 상나라의 영역 바깥에 다른 문자가 없었기때문에 최초의 중앙집권적 왕조로 볼수있으며 다른 문명들도 존재 하였겠지만 아직 역사적 증거가 없고 있어도 소수의 부락 수준이었다. 주나라가 건국하고도 몇백년 뒤인 [[주나라]] 후기 동주 시대 수도 [[낙양]] 서쪽 산에 이민족 부락이 발견된게 최초 기록이었으니 상나라를 가장 오래된 문명국가이자 중앙집권적 최초의 왕조로 보는건 합당하다. 주나라 봉건통치 이후에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분열하여 생겨났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규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통일왕조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한족]]이라는 중화의 민족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중화의 대표적 민족인 한족이 확정된 것은 전체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게 아니었다. 중국 학자는 실존이 확인된 최초의 통일왕조 국가인 상나라의 황하문명과 함께 볍씨가 발견된거 외엔 역사적 증거가 없어서 실존을 인정하기 어렵고 입증자체가 불분명한 전설속 장강문명까지도 합쳐서 중국 문명이라고 하고는 있지만 장강문명 또한 황하문명에서 확장된 세력이 진출하여 장강문명을 이뤘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고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역사책)|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국제사회라는 표현은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의 표현이기 때문에 고대사까지 소급해서 적용하기는 다소 곤란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미국 위주로 돌아가긴 하나 명목상 대등한 관계이다. 그러나 商은 갑골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주변 국가들에게 명목상으로도 상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한 듯 보인다. 왕이 가지는 권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 당시 중국에는 상나라를 섬기는 성읍 국가와 상나라를 섬기지 않는 수많은 이민족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어느 지점을 경계로 나뉜 것도 아니다. 이민족 사이에 상나라 성읍이 있기도 하며 상나라 성읍 사이에 이민족 부락이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소위 '스위스 치즈'와 같은 영역, 즉 상나라 영역 내에 다수의 非商 영역이 있었다는 데이비드 키틀리의 비유가 유명). 이는 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상, 주의 영향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으니 더 많은 성읍들이 복종해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민족은 토벌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다. 결국 한나라 시대가 되면 파촉, 형남, 강남에는 가야 이민족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영토 국가가 아니라 商을 주도로 하는 성읍 국가 간 네트워크였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치 체제 발전이 덜 되었던 것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그 당시 중원의 환경이다. 상고시대만 해도 황하 주변 많은 지역이 밀림이었다.[* 상나라 유적에서 현재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열대 기후의 코끼리 화석이 나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크 엘빈은 코끼리의 후퇴라는 기후사 서적에서 이 점을 고찰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살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잦은 전쟁 때문에 황하 유역은 평지가 되고 교통이 발달했으며 거대한 국가가 등장하였다. 반면 장강 유역은 여전히 밀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거니와 그마저도 몇몇 거점도시에 밀집되어 그 밖으로는 이민족이 여전히 많았다. 따라서 하나라의 존재 근거가 없는 상태이므로 하나라와 다른 실체가 있는 집단에서 상나라로 변화된것이 아니라면 상나라 왕조 자체 내에서 문물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새롭게 정비했거나 상나라가 생겨났다고 예측되는 시기보다 더 이전부터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상나라 왕인 탕왕의 존재만 그간 갑골문 연구를 통해 추가 증명되었을 뿐이며 하나라를 입증할 역사적 증거는 전혀없어서 입증이 불가한 전설속 국가지만 국책연구사업으로 인해 연표는 확정되어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에서는 전설과는 다르게 탕왕이 하나라를 물리친 역사 기록이 없으며 하나라에 대한 흔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