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나라 (문단 편집) == 역사 == 탕왕 이후 상나라는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은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중국)|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 출토가 드물다. 사실상 갑골문은 상나라의 문자가 명확하며 은허 이전의 갑골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갑골문이 써지기 전 고고학적으로 드러나는 상나라 전기에 대해서는 관련 전공의 석사과정생이 최근 중국고중세사 분야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75364|#]] 기원전 13세기 [[무정(상)|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 오거가 (걱정하며)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상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 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 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 戎 翟叛 君其慎終" - 사기][* 이러한 사실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으로 서방 지역에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대전|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 미자(微子) 계(啓)에게는 공작위를 수여하여 제후국인 [[송(춘추전국시대)|송(宋)]]에 봉했고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祭祀)를 계승하게 하였다.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전 왕조의 후예를 대우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