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계군 (문단 편집) === 사후 삭탈 === 그러나 상계군과 관련된 사건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상계군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인 송낙휴가 [[상복]]을 입은 채로 [[궁궐]]로 가서 고변했다. 내용은 "상계군은 파양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김 정승(영의정 김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급사했다."였다. 또한 송낙휴는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이 상계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란 말도 했다. 구선복은 체포당해 [[고문|심문]]을 버티다가 결국 [[반역]]을 꾀해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련자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고 상계군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 역시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갔다.[* [[능성 구씨]]는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무손을 많이 배출한 무반의 명문이었는데 이 일로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가 나섰다. 이미 오래 전 일인 1779년(정조 3년)에 상계군이 [[홍국영]]의 힘으로 완풍군으로 봉군되고 왕위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해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그에 관한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를 [[승정원]]에 내린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상계군의 작위를 즉시 폐작시켜 '''"역적 담"'''으로만 부르게 했고, [[역적]]의 [[가족]]이 된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갔다. 이후 [[정조(조선)|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 일을 말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