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팔선 (문단 편집) === 발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oopedia.co.kr/35147.jpg|width=100%]]}}}|| || '''"당신은 지금 38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br]-미 육군 제728 헌병대-''' ||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8월 8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이 물밀듯이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만주에 100만 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소련군에 의해 1주일 만에 무너졌고, [[8월 15일]] 청진시까지 점령한 소련은 [[쇼와 덴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렇게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소련과 협상했다. [[미군]]은 아직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계선 정도로 협상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군 사령관은 삼팔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삼팔선 이북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때 미군이나 연합군은 한반도에 없던 상황에서 소련이 먼저 삼팔선을 봉쇄하고 북한을 준비해둔 계획대로 공산화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다른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 부산, 인천, 원산]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광역시|인천]]과 [[부산광역시|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특별시|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371576|얘기다.]] 어쨌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겠다고 하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게 되었다.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러나 북한을 일제로부터 자유를 주러 온 해방군이라고 선전하고 포섭한 소련은 1945년 8월 26일 공식적으로 삼팔선을 봉쇄하면서 전화 통신, 물자의 왕래 등 대부분을 끊고 당분간 민간인의 통행은 모르는 척 했을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