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비 (문단 편집) ==== 청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 ==== 삼전도비의 상징성이 상징성인지라 비석을 세운 직후부터 이미 삼전도비에 대한 수난설(?)이 돌고 있었고, 청나라는 또 이것을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빌미로 써먹었다. 비석을 세운 바로 그해 7월 5일,,(음력 5/21),,에 [[잉굴다이]]는 [[정명수]]를 시켜 [[소현세자]]에게 '삼전도에 세운 비석을 부수었다는 말도 있던데, 조선이 군사 원조를 일부러 지체하고 있는 것 아니냐'[* 이해 청나라는 명나라의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면서 참전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임경업]]과 전선 120척과 군량 1만 석을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의 의심도 완전히 근거 없는 건 아니라서 임경업은 [[최명길(조선)|최명길]]을 통해 명나라와 짜고 치는 싸움을 벌인데다 청나라에 군량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결국 금주위가 함락된 다음에 이게 들통나서 임경업은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는 식으로 압력을 넣기도 했다. 연말에 새로 들어온 청 사신이 삼전도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면서 일단 의심은 풀리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청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삼전도비를 찾아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반복했다.[*N 심양장계 1640년 5월 22일, 인조실록 1640년 5월 17일, 10월 30일, 1641년 11월 8일, 1642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1641년 11월 7일, 1641년 11월 8일, 11월 11일, 1642년 12월 15일, 12월 16일.] 이러한 청 사신들의 지속적인 확인은 1643년,,(인조 21),,이 되어서야 중단되었으나, 그 뒤에도 사신들은 비정기적으로 종종 삼전도비를 찾았다. 그러다 [[숙종(조선)|숙종]] 시기부터는 다시 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찾는 필수코스가 되었고, 사신들은 삼전도비를 보지 못하면 탁본이라도 챙겨서 돌아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승정원일기를 통해 1662년,,(강희 1),, · 1672년,,(강희 11),, · 1676년,,(강희 15),, · 1677년,,(강희 16),, · 1679년,,(강희 18),, · 1680년,,(강희 19),, · 1681년,,(강희 20),, · 1682년,,(강희 21),, · 1684년,,(강희 23),, · 1687년,,(강희 26),, · 1688년,,(강희 27),, · 1689년,,(강희 28),, · 1690년,,(강희 29),, · 1697년,,(강희 36),, · 1709년,,(강희 48),, · 1717년,,(강희 56),, · 1719년,,(강희 58),, · 1720년,,(강희 59),, · 1721년,,(강희 60),, · 1722년,,(강희 61),, · 1723년,,(옹정 1),, · 1724년,,(옹정 2),, · 1729년,,(옹정 7),, · 1731년,,(옹정 9),, · 1736년,,(건륭 1),,에 삼전도비를 찾은 것이 확인된다. ~~아놔 작작 와라 좀~~ 승정원일기 1643년 3월 27일, 1649년 1월 20일, 1662년 12월 7일, 1672년 1월 11일, 1676년 3월 20일, 1677년 11월 5일, 1679년 2월 17일, 1680년 9월 26일, 1681년 4월 8일, 1682년 2월 24일, 7월 8일, 7월 10일, 1684년 7월 9일, 12월 16일, 1687년 7월 16일, 1688년 12월 24일, 1689년 2월 22일, 1689년 11월 28일, 1690년 1월 24일, 1697년 10월 4일, 1709년 5월 12일, 1717년 10월 30일, 1719년 2월 29일, 3월 1일, 1720년 11월 29일, 1721년 2월 13일, 1722년 5월 29일, 12월 17일, 1723년 2월 2일, 7월 7일, 11월 7일, 1724년 2월 14일, 3월 20일, 1729년 5월 23일, 1731년 11월 7일, 1736년 3월 7일.] 물론 현장에서 사신을 대접하는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조선 조정도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의 위치나 구조(엄연히 군사 기밀이다)가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찌되었든 외교적인 차원에서는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중간에 위기도 있었는데,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이 소문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갈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게다가 하필이면 이 와중에 대홍수[* 김시형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하중도였던 잠실 전체가 물에 잠기고, 송파에서 민가의 3분의 1이 떠내려가고, 상류에 있는 궁촌(지금의 광주 춘궁동 고골초등학교 일대) 앞까지 물이 들어왔을 정도였다. 승정원일기 1728년 8월 2일.]까지 터지면서 삼전도비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 보기에는 [[쌤통]]이지만, 이게 또 자칫하다 외교문제로 번질 수 있는지라 조선 조정에서는 서둘러 삼전도비 주변을 정비했고, 이듬해 5월에 청 사신이 왔을 때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O 승정원일기 1728년 7월 16일, 8월 2일, 1729년 5월 23일.] >장붕익[* 포도대장, 훈련대장, 형조판서 등을 역임. 80세의 늙은 나이에 폭력집단 [[검계]]에서 보낸 암살자가 자신을 습격하자 맞서 싸워 달아나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이 아뢰기를, "[[이인좌의 난|지난 변란이 일어났을 때,]] 유언비어가 퍼져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과 병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각각 장교를 보내 나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헛소문이었고 조금도 손상된 부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일종의 요사하고 간악한 무리가 지어낸 망측한 말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가, 저들이 혹 그 헛소문을 믿어 칙사라도 나온다면 그때를 틈타 불순한 무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와 변을 일으킬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우환을 방비하는 도리에서 만일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 비각을 보니, 담장도 높지 않고 문빗장도 허술하였습니다. 응당 즉시 병조 판서에게 분부하여 수직하는 사람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다시 담장을 높게 쌓고 문빗장도 쇠로 얽어 두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나라 사람이 혹시 와서 문과 담장을 개축한 일에 대해 물으면 실상대로 대답한다고 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뜻으로 병조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html ─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음력 7월 16일}}} 그러다 1735년,,(영조 11),,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비문에 써 있는 [[강홍립]]의 이름 때문이었다. 새로 즉위한 [[건륭제]]의 이름이 훙리(弘歷)로 홍립(弘立)과 [[피휘|글자와 소리가 같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홍립의 이름은 졸지에 강황래(姜黃來)로 개조되었다.[* 참고로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홍례문(弘禮門)도 같은 이유로 흥례문(興禮門)으로 피휘되었다. 승정원일기 1735년 11월 14일, 1866년 12월 15일.] 이런 일도 있고, 이 즈음에 들어서 청 사신이 삼전도비를 찾을 때마다 백성들에게 상당한 민폐가 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1737년,,(영조 13년),,부터는 청 사신이 비각을 직접 찾지 않고 탁본만 받아가는 것을 상례로 삼게 되었다. 이로부터 삼전도비에는 청 사신의 발길이 끊기게 된다.[*P 승정원일기 1737년 6월 10일.]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겸재정선_송파진_경교명승첩.jpg|width=100%]]}}} || || 1741년, [[정선(화가)|겸재 정선]]의 그림. 오른쪽에 삼전도비각이 보인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