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비 (문단 편집) ==== 굴욕의 상징이 세워지다 ==== 1639년 7월 25일,,(음력 6/25),,에 청나라 사신 [[마푸타]]가 다시 한양에 들어왔다. 마푸타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삼전도비부터 찾아서, 조선 조정에서도 다시 작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문과 비석이 모두 준비되었으니 남은 건 글꼴을 갖추어 새기는 일이었는데, 당초 비문 상단의 전액(전서체로 쓴 제목)은 동양위 신익성이 쓰고 본문은 영접사를 맡은 오준이 쓰도록 하였으나, 다음날 바로 신익성이 '오른팔이 마비되어 붓을 못 든다'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결국 제액은 신익성 대신 예조참판 여이징이 쓰게 되었고, 7월 27일,,(음력 6/27),, 밤을 새워가면서 간신히 완성을 볼 수 있었다.[*H 인조실록 1639년 6월 25일, 승정원일기 1639년 6월 25일, 6월 26일, 6월 28일.] >비문을 지을 자와 베낄 자 등을 일체 전교에 써넣은 대로 즉시 비석을 세울 곳에 내보내어 이대로 쓰고 즉시 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칙사가 역관 등으로 하여금 새기는 일을 신에게 독촉하도록 하고 말하기를, '반드시 떠나기 전에 새기고 인출한 다음 세워야 하며, 세우는 날에는 국왕도 나가고 우리들도 가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석면을 나누어 3등분하니 쓸 곳이 지극히 좁아져서 각수(刻手)가 그 돌에 많이 오를 수 없고 불과 두세 사람이 작업을 하므로 이 때문에 새기는 공사가 더욱 늦어져서 적어도 20여 일은 걸릴 것이다. 또 이처럼 무거운 돌은 매번 세웠다 눕혔다 할 수가 없으므로 청나라 글자와 몽골 글자를 다 새긴 뒤에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더니 비록 귀담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재촉해서 서둘러 하라고만 명하였습니다. >{{{#!html ─ 승정원일기 인조 17년 기묘(1639), 음력 6월 28일}}} 여기에 새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최초에는 비석 앞면을 삼등분해서 만주글자 · 몽골글자 · 한문으로 나누어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작게 새기다보니 작업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마푸타는 기어이 세우는 꼴을 보고 떠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석공이 하루에 몇 자씩, 몇 사람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지까지 파악해서 관리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마푸타가 조선 측 하소연을 받아들여 '늦더라도 제대로 새기라'는 요지로 귀국길에 올랐고, 마푸타가 떠난 지 22일 만인 8월 26일,,(음력 7/28),,에 드디어 작업이 일단락되어 서둘러 탁본을 마푸타에게 보냈다.[*I 승정원일기 1639년 6월 27일, 6월 28일, 6월 29일, 7월 2일, 7월 28일, 인조실록 1639년 7월 28일.] 그런데 연말이 되자, 다시 조선에 들어온 청 사신단이 갑자기 앞면에는 만주글자 · 몽골글자만 새기고, 한문은 뒷면에 새기는 것으로 체제를 바꿔버렸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독촉해서 공사를 강행한 것이 말짱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형조참판 오준이 다시 한 번 삼전도로 가서 뒷면에 가득 들어가는 크기로 글씨를 썼고, 오준이 현장을 감독하는 가운데 12월 24일,,(음력 11/20),, 저녁부터 스물세 명의 석공들이 밤낮으로 글자를 새겨서 청 사신이 도착하는 28일 오후에 간신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J 인조실록 1639년 11월 15일,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16일, 11월 17일, 11월 22일, 11월 24일.] 이제 남은 건 한문으로 된 비문을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여 새기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구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청 태종이 마푸타와 함께 차바하이(cabahai), 이서봉(李棲鳳), 비릭투(biliktu) 세 사람의 박시(baksi)[* 청나라에서 문관을 부르던 칭호. 기원은 그냥 '박사(博士)'다(...). [[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24/2007102400548.html|#]] 승정원일기에는 박씨(博氏), 청실록에는 파극십(巴克什)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외에도 파십(把什) · 방십(榜什) · 방식(榜式) 등으로 음차되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만주글자를 만든 어르더니 박시(erdeni baksi/額爾德尼 巴克什)가 있고, 상술한 범문정도 박시로 호칭되었다.]를 보내 삼전도비의 비문을 확인하고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게 했다. 이들은 12월 28일,,(음력 11/24),,에 한양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날부터 삼전도를 오가며 비문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해 사흘 만에 번역이 모두 완료되었다.[*K 청실록 1639년 11월 6일,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24일, 11월 25일, 11월 26일, 11월 27일, 동문휘고 1639년 5월 13일 반제남전첩칙일도.] >이에 앞서 [[숭덕제|상(上)]]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조선을 정벌하시어, [[인조|국왕 이종(李倧)]]을 남한산성에서 포위하고 그 처자를 사로잡으니, 군민의 위험이 박두하여 국세가 거의 망하였다. 이종이 비로소 남한산성을 나와서 군문에 이르러 복종하니, 상께서 특별히 동정하여 용서하고는 왕을 나라로 돌려보내고, 그 처자는 귀가시키고 그 국토는 회복시키고 그 인민은 안정시키고, 이종에게 왕작(王爵)을 봉한 것이 예전과 같았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왕이 상의 공덕을 반포하여 삼전도 지방에 비를 세워 만세토록 전하여 보이고자 하니, 그 일을 주문(奏聞)하였다. 상께서 내원관(內院官) 차바하이(查布海), 이서봉(李棲鳳), 비릭투(畢禮克圖)와 함께 호부승정 마푸타(馬福塔), 예부참정 초거르(超哈爾), 형부참정 종실 오다하이(吳達海) 등을 보내서 살피게 하였다. >{{{#!html ─ 청태종실록 숭덕 4년(1639), 음력 11월 6일}}} 그렇게 해를 넘긴 1640년 1월 1일,,(음력 11/28),,부터 비석 앞면에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이에도 청 사신은 수시로 공사 현장을 확인하면서 비가 완성된 뒤에 떠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비문의 제목에 해당하는 큰 글자에는 금을 씌우고 다른 글자에는 붉은색을 입힐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1월 8일,,(음력 12/5),,에 세 글자로 각각 "숭덕 4년 12월 8일 세우다"라는 글씨를 새기면서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1월 10일,,(음력 12/7),,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글자에 색을 입히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완공을 본 사신단은 다음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L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28일, 11월 29일, 11월 30일, 12월 1일, 12월 2일, 12월 4일, 12월 5일, 12월 7일, 12월 8일.] 끝으로 4월 1일,,(음력 2/11),,까지 비석에 비각을 씌우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삼전도비를 세우는 모든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후 삼전도비와 그 비각은 경기감영에서 맡아 관리하면서, 죄 지은 자 3~4인을 배정하여 지키도록 했다.[*M 승정원일기 1639년 12월 20일, 인조실록 1640년 2월 11일.] 이로써 [[삼전도의 굴욕]]에서 장장 3년 2개월이 걸린 모든 공정이 끝났다. 청 태종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거대한 비석이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영원히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