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비 (문단 편집) ==== 비문은 너희들이 써라! ==== 1637년, [[청나라]]는 [[조선]]을 기습 공격하며, 결국 조선 왕 [[인조]]가 포위당해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자세한 전개는 [[병자호란]] 문서 참조. 1637년 2월 24일,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숭덕제|태종]] 앞에서 [[삼전도의 굴욕|삼배구고두로 항복]]하고 가까스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후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마푸타]]를 통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경기도 광주부 중대면 송파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에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부터가 자신의 굴욕이 쓰인 비석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보류했다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생색은 많이 낼 수 있으니 해버리자'는 [[김류]]의 청원에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기도 했다.[*A 승정원일기 1637년 3월 12일, 3월 15일, 3월 20일 조.] 이로써 그해 8월 16일,,(음력 6/26),,부터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단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홍수가 나면 침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당시보다 오히려 더 높고 크게 만들어야 했다.[*B 인조실록 1637년 6월 26일, 승정원일기 1637년 6월 26일.]이후 공사가 꾸준히 진척되어 12월 18일,,(음력 11/3),,에는 기초가 완성되었고, 그 위에 정문과 담장까지 세웠다. 이제 비석과 비각만 만들면 되었다.[*C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3일.] 청나라 측에서도 이 비석을 세우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여서, 이듬해 1월 8일,,(음력 11/24),,에는 책봉사로 온 [[타타라 잉굴다이]]와 [[마푸타]]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다음날 인조가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사신들이 담장과 귀부(비석의 거북이 모양 받침)에 대해 언급한 것이 확인되는데, 이 대목의 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크기나 형태를 문제삼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미 만든 귀부는 버리고 더 큰 귀부를 새로 만들어 쓰게 되었고, 이때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가 지금도 삼전도비 곁에 나란히 있다.[* 실제로 이 버려진 귀부는 약간 작기도 하고 상당히 귀엽게 생겼다. 다만 이 귀부가 1950년 이전의 사진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1961년에 삼전도비의 위치를 석촌동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아무 관계 없는 귀부가 세트로 묶였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이마니시 류의 1916년도 고적조사 보고서에도 삼전도비 부근에 한 귀부가 있다고 전하고 있어서, 부근에 버려진 귀부가 하나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어쨌든 귀부에 대한 언급은 청실록 1637년 10월 26일,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4일, 11월 25일, 1638년 8월 16일, 삼전도비 현장 설명문 "비신(碑身) 없는 귀부(龜趺)", 다이쇼 5년도 고적조사 보고서에 나타난다.] 문제는 비문의 내용이었다. 자랑스러운 승전비도 아니고 굴욕적인 항복의 내용이 담긴 비석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아무도 비문을 작성하려 하지 않았고 차일피일 시간만 소모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측은 청나라에서 비문 내용을 내려줄 것을 은근히 원했지만 청나라는 단호하게 조선에서 써낼 것을 요구했다. >사신: 비문은 우리들이 돌아가기 전에 지어서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들이 비록 문자를 알지 못하나 다른 사람에게 해석하게 하면 글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조: 비문은 당초 대국에서 지어 보내 주겠다는 영(令)이 있었으므로 이번에 대인이 올 때 반드시 가져오리라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지금 이렇게 지어 보여 달라는 명이 있으니, 이것은 소국이 감당하여 할 바가 아니오. > >사신: 비록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어서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 >인조: 대국에서 지어 보내겠다는 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방(小邦)의 사람 중에는 찬술할 만한 문장이 훌륭한 인재가 전혀 없으니, 반드시 대국에서 지어 보낸 뒤에야 될 수 있을 것이오. > >사신: 이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실은 황제의 교령(敎令)입니다. 오직 귀국이 지어서 우리들의 이번 행차 편에 부쳐서 황제께서 보시게 하기를 바라니, 전에 하던 대로 개찬하는 것은 황제께 달린 일입니다. > >인조: 이것은 심상한 비문이 아니고 황제의 덕을 찬송하여 천년토록 전할 것인데, 우리나라의 문사(文詞)가 졸렬하여 찬술할 수 없소. 어렵게 여겨 주저하는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러나 이렇게까지 수고스러이 말씀하시니 감히 어기지 못하겠소. 대신에게 물어서 문예에 조금 장기가 있는 자를 택하여 지어 보도록 하겠소.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음력 11월 25일 결국 조선에서 비문 내용을 적어보내야 했다. 조정에서 급히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장유(조선)|장유]] · 이경전 · 조희일 · [[이경석]]의 네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크나큰 굴욕이 될게 뻔한 데다가 개인적으로도 좋다고 나설 일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삼전도비의 비문 내용을 지어 올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장유 · 이경석 · 이경전은 '[[판사드립#s-3|임금님 저는 글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부터 시작해 온갖 핑계를 대며 못 쓴다고 상소를 올렸고, 조희일은 일부러 채택되지 않도록 거칠게 글을 써서 내는 등 그야말로 비문의 작성자가 되지 않기 위한 당시 선비들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나마 장유와 이경석이 글을 써서 낸 덕분에 간신히 청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글을 보낼 수 있었다.[*D 인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5일, 11월 26일, 11월 27일, 11월 29일.] 이로써 어찌어찌 조선에서 보낸 글을 받아본 청나라 대학사 [[범문정]][* 범문정(范文程, 1597 ~ 1666), 누르하치의 [[야율초재]] 같은 역할을 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고 만주지역에 파견되었으나, 1618년 무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이어 누르하치에게 귀순하여 그의 군사노릇을 하게 된다. 누르하치가 죽은 이후 홍타이지의 최측근으로서 만주족을 제국 체제로 개조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 뒤이은 순치제 시절에는 한족 최초로 의정대신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은 장유의 글에 '견양(牽羊)'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춘추시대 정나라 양공이 [[초장왕|초나라 장왕]]에게 항복한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후끼리 서로 침략한 고사이므로 인용하는 것이 온당치 않고, 이경석의 글은 쓸 만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정작 이경석의 글에 나오는 '서리바람이 가을 풀을 휩쓸듯'이란 비유는 부견이 [[비수대전]] 직전 위세를 과시하던 말에서,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란 비유는 [[형가|사기 자객열전]] 중 진시황의 사나운 기세를 비유한 말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견]]과 [[진시황]]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청나라는 결국 간접적으로 엿을 먹은 셈(…). 사기 자객열전, 진서 부견재기, 숙종실록 1713년 8월 6일.] 내용이 소략하므로 적어준 내용을 추가하라고 회답했다. 흥미롭게도 이 당시 범문정이 적어준 당안 원본이 대만에서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거의 전부 삼전도비문에 반영되어 있다.[*전문 리광타오(李光濤), 『명청당안 존진선집(明淸檔案存眞選輯)』 초집, 중화민국 18년(1930) 6월, "숭덕 2년 12월에 조선에서 황제의 공덕을 칭송한 비문으로 보이는 원고(가제)";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馬夫大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제38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년 2월, 245~247쪽에서 재인용 및 일부 윤문. {{{#!html }}} ① [[사르후 전투|기미년]]에 우리 조선이 [[강홍립|강홍례(姜弘禮)]]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명을 돕게 하였는데, 장병들이 대패하여 피살된 자도 있고 사로잡힌 자도 있었다. 우리 태조황제께서 화호를 중요하게 여기시어 사로잡힌 장병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를 돕다가 다시 대청에 죄를 얻게 되었다. 이에 정묘년에 황제께서 대군에게 정벌을 명하셨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강화도에 숨었다가 화친을 청하자, 황제께서 윤허하고 오히려 형제국으로 여겼으며, 빼앗은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강홍례도 또한 환국하게 했다. {{{#!html }}} ② (정묘년 이후) 10년 동안 황제께서는 형제의 예를 다하셨으나, 우리 조선국이 깨닫지 못하고 미혹되어, 여전히 명을 돕고 대청을 형으로 여기지 않더니, 먼저 병화의 단서를 스스로 일으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기를 '충의지사로 하여금 각기 책략을 바치게 하고, 용맹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종군토록 하라'고 하였다. 대청국의 사신이 이 문서를 얻어 황제에게 보였다. 황제가 우리 조선이 화평을 무너뜨렸음을 밝혀 아시면서도 오히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그 죄를 밝히면서 '모년 모월 모일에 정토하리라'고 하시고, 우리에게 정토의 시비를 밝혀 가르쳐 주시기를 하늘이 재이로써 사람에게 보여주듯,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듯, 형이 동생을 가르치듯 하시었다. 만일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반드시 불시에 군사를 내시어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게 우리를 가르치셨겠는가. 그런데도 국왕이 깨닫지 못한 고로 황제가 대군을 친히 이끌고 우리 조선을 정벌하신 것이다. {{{#!html }}} ③ (조선이) 감히 맞서지 못하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강화도에 숨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동남도의 병장들이 서로 이어져 무너졌고 서북도에서는 협곡에 둘러싸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 조선국왕은 안으로 군량이 없고 밖으로 원병이 없었으며 형세는 궁하고 힘은 다하였다. 강화도에 있던 우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황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황제께서 만물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으로 우리 군신 처자에 대해 장병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조선 관원으로 하여금 태감과 더불어 간수하게 하였다. 황제께서 칙서를 내려 죄를 사하여 주시니, 우리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이 큰 가뭄에 비를 만난 듯, 물에 빠졌다가 구해진 듯하며, 기뻐하고 두려워하여 황제의 군대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은상이 우리 군신에게 두루 미쳤으며, 붙잡힌 처자들은 모두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었으니, 이미 끊어진 종사가 다시 이어지고 이미 무너진 조선이 50일만에 다시 서게 되었다. {{{#!html }}} ④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신과 만민들이 황제의 공덕과 은택을 칭송하여 머리 위에 이고자 하였다. 황제의 공덕은 천지와 더불어 오래가리니, 우리나라가 태평을 누리게 된 것은 모두 황제께서 여기에 와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황제께서 머무르신 단장(壇場)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드러내었다. {{{#!html }}} ⑤ (숭덕) 2년 12월에 처음 쓴 글. 이 글은 칙지를 받들어서 저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니, 단지 베껴서 그 배신(陪臣)에게 내어주어 보고 기록해 가게 하라. 이 문서는 문서대장에 기록해 두어 후일에 참고하게 하라.] 이에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다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E 심양장계 1638년 1월 26일, 동문휘고 1639년 청택정삼전도비문자, 1640년 1월 26일 예부회자, 인조실록 1638년 2월 8일,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서계집 영의정 백헌 이공 신도비명.] >저들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와신상담|구천이 회계에서 신첩 노릇을 하다가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이루었으니,]] 다른 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이다. 오늘 할 일은 단지 문자로만 저들의 마음에 들게 지어서,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html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결국 [[이경석]]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 임금의 공덕을 찬양해 오계(浯溪)의 바위에 새겼던 원결(元結)처럼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비문으로 짓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평정된 뒤에 원결이 '대당중흥송'을 짓고 안진경이 글씨를 써서 오계의 절벽에 새겨 [[숙종(당)|당 숙종]]의 공덕을 찬양한 바 있다. 흔히 알려진 '오계의 백 길 절벽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표현은 이덕일에게서 비롯된 명백한 오역이다.]라는 시를 지어서 한탄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어렵사리 만들어진 비문은 다시 6월에 청나라로 들어가는 사신 편에 보내져서, 그해 7월에 청나라 측의 승인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F 서계집 영의정 백헌 이공 신도비명, 승정원일기 1638년 2월 19일, 2월 24일, 11월 23일, 인조실록 1638년 7월 2일, 7월 24일.] 그러나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이경석에게 평생토록 마음의 짐으로 따라다녔고, 말년에는 이 건으로 [[송시열|12살 어린 후배]]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이경석#s-3.2|수이강 사건]]). 한편으로 청나라에서 비석을 더 크게 만들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주문했기 때문에, 그해 9월 23일,,(음력 8/16),,에는 충주로 석공들을 보내 돌을 캐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충주에서 캐낸 비석을 한강으로 삼전도까지 실어와야 하는데, 돌이 워낙 큰 데다 장맛비가 내리지 않아 그만한 크기의 배가 충주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비석은 겨우내 충주에 방치되었다가 다시 이듬해인 1639년 봄이 되어서야 간신히 삼전도까지 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이 비석을 강가에서 비각까지 끌고 오는 데 다시 4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만큼 이 비석은 당시 조선에서 유례가 없던 크기였다.[*G 승정원일기 1638년 7월 26일, 8월 16일, 11월 23일, 1639년 3월 25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