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성자동차 (문단 편집) == 역사 == [youtube(YHMuifdPYSM)] [[르노삼성 SM5|SM5]]의 1차 티저 광고. [youtube(1LkCtz_O2UQ)] [[르노삼성 SM5|SM5]]의 2차 티저 광고. >10년 이상을 생각하고 만듭니다. 탈수록 가치를 느끼는 차, SM 5 >---- >삼성자동차, [[https://www.youtube.com/watch?v=O7eIfYcwvfA|SM 5]] 광고 중에서 호암 [[이병철]] 회장 시절에도 자동차 사업 진출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이병철 회장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지 않았다.[*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의 사업 이야기에서 전자와 자동차 중에서 [[이맹희]]가 자동차 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내자 이병철 회장은 "전자제품의 그램 당 부가 가치가 자동차의 10배 가량인데 전자가 낫지 않겠냐?"고 되물어 이맹희를 [[데꿀멍]]시키고 전자 산업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동창이자 사돈이었던 [[구인회(기업인)|구인회]]와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LG|LG그룹]]과도 경쟁구도가 형성되었다. -출처 : 이건희 스토리 - ][* 또한 1976년 [[아시아자동차]]가 매물로 나왔을 시기 강력한 인수후보였으나, 인수를 거절하고, 결국 [[기아|기아산업]]이 인수한 예로 볼 때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자동차 사업 진출이 숙원사업이였는지는 의문스럽다(당시에는 대기업이 부도날 무렵에는 정부에서 인수대상 기업을 '''지정하여''' 인수요청을 했다. [[국제그룹]]이 [[국제그룹 해체 사건|공중분해]]되었을 때에도 인수 대상이 정권에 의해 이미 지정된 상태다.).] 1987년 11월 삼성그룹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애호가|자동차 매니아]]이며 자동차 사업 진출에 착수했다. 1990년대 즈음 [[현대그룹]]은 [[SK하이닉스|현대전자]]를 세워 전자/반도체 산업에 진출하면서 삼성그룹을 쫓아오고 있었는데, "현대는 삼성이 하는 건 다 하고 있지만 삼성은 현대가 하는 것을 다 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에 그룹의 브랜드 가치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동차 산업은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분명히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더 늦기 전에라도 뛰어들기 위한 노력을 백방으로 해왔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의 과잉 투자에 대해 우려하던 당시 노태우 정부의 산업 정책에 가로막혀 실패에 부딪혔다. 이 당시에는 자가용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던 시기라서 딱히 미래먹거리론이 아니더라도 자동차 산업진출이 구미에 당기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부의 판단은 틀리지는 않아서 IMF 시절 삼성자동차, 기아,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등 현대자동차를 제외한 국내 자동차 기업들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1992년 7월 [[삼성그룹]]은 정부로부터 자동차(상용차) 제조 사업 인가를 받았고, 상용차(트럭)을 출시했다. 이는 승용차 진출을 허가받지 못한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에서 상용차를 출시하여 우회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기 위한 시도였고, 결론적으로 이는 성공적인 전략이 되었다. 1993년에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삼성생명]]을 통해서 기아의 주식을 매입하기도 했었다. 삼성차 법인 설립 이후에도 기아를 인수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http://bulgom119.tistory.com/574|#]] 삼성자동차의 현장 영업 사원들에게 배포된 자료에, 당장 부족한 정비망에 대한 질문이 고객으로부터 있을시에 "조만간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여 전국적인 인프라를 확보 할것" 이라는 응대 매뉴얼이 있을만큼, 기아 자동차의 인수에 진심 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자동차 공장 부지로 세 곳을 후보지로 고려했는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텃밭인 부산의 민심을 노리기 위해 부산 신호공단을 공장 부지로 선택했다. 이후 부산 지역 여론이 앞장서서 삼성자동차를 허가를 촉구하였다. 1994년 4월 [[닛산]]과 승용차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여름까지도 삼성자동차 불허 방침을 거듭 밝혔고, 이에 삼성 관계자들은 크게 낙담했다. 그러나 부산 지역 민심의 목소리, 그리고 삼성중공업에서 이미 상용차를 성공적으로 출시한 경험은 정부가 삼성자동차를 불허 입장을 고수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1994년 12월 정부로부터 승용차 사업 허가를 받았다. 1995년 3월 삼성자동차가 출범하였다. 1995년 4월 [[부산광역시]] [[강서구(부산)|강서구]] 신호동 녹산국가산업단지에 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1998년 3월에 첫 양산 모델인 [[르노삼성 SM5|SM5]]를 출시하였다. 생산 차종은 SM5 단일 모델이었다. 닛산의 경영난을 이용해 [[닛산 세피로]]/[[닛산 맥시마|맥시마]]의 설계와 라이선스를 사들여 전후면부 디자인만 바꾸어 출시한 차였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현대자동차|현대]], [[기아]], [[대우자동차|대우]], [[쌍용자동차|쌍용]]이라는 경쟁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기묘하게도 [[르노삼성 SM5|SM5]] 출시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터진 [[1997년 외환 위기]]로 타격을 입어 삼성자동차는 물론 경쟁사들도 역시 현대자동차만 빼고 다 망했다.[* 기아는 국제 입찰을 거쳐서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다. 대우는 [[제너럴 모터스|외국 자본]]으로 흡수당해 [[한국GM|공중]][[자일대우버스|분해]][[타타대우상용차|되었고]], 쌍용자동차도 법정관리되었다. 사실 현대자동차마저도 상황이 비슷했으나, 현대자동차를 지키는 대신 그룹 자체를 분해시켰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렇게 계열 분리가 되어 [[프랑스]]의 [[PSA 그룹]]([[푸조]]-[[시트로엥]])과 비스무리한 [[현대자동차그룹|현대-기아 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장 이하 전 직원을 자동차 정비 학원에 보내어 정비 자격증을 따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차를 팔수 있느냐.. 는 이건희 회장의 직접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초기 영업 팀장급 (경쟁사 스카웃 및 계열사 대리급 사원) 들을 6개월 여의 시간을 투자하여, 일본에서 시행 하고있는(지금 현재도 시행중) 중고차 사정 시스템을 도입, 주먹 구구식이고 불투명한 중고차 처리 방식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무리하게 부산에 입주하느라 초기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게 됨으로써 [[1997년 외환 위기]] 한 방에 조기 자본잠식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의 빅딜 지시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국 정부, 삼성, 대우 간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빅딜이 깨졌다. 1999년 6월 30일 누적 적자로 법정관리를 신청하였고,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자동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삼성생명 주식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사재를 털어 삼성자동차에 투입하기로 하였다. 다만, [[삼성생명]]의 주식 시장 상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삼성생명의 상장은 한참 지난 2010년에야 이루어진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법정 관리 이후 정부는 대우그룹 등에 인수 혹은 자산 매각 및 부채 이전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다. 2000년 [[프랑스]] [[르노]]가 세운 신설법인 '르노삼성자동차'로 자산이 매각, 승계되면서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편입되었다. 반면 기존 법인은 청산법인으로 전락해서 정리 절차를 밟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