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에필로그 === [[백제]]는 일단 망했고 그 결과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역시 백강 전투 이후로는 백제 유민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더 이상 백제 부흥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전투 이후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정반대로 일본서기 기록상 신라와 왜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다. 백강 전투 직후~8세기까지 외교교섭의 빈도수는 백제 때만큼 끈끈하지는 않았지만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잦고 활발했다. 이는 왜국과 신라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국 측은 백제 저항세력 수뇌부가 백강 전투로 완전히 무너졌으니 더 이상 백제를 도와줘봐야 백제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백제 저항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왜국]]에도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슈]] 지역 해안에 방어성을 쌓는 등, 혹여나 나당연합군이 왜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했다. 결국 실행되진 않았지만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당이 왜를 공격한단 명분으로 함선을 수리했던 일도 있어 일본 측의 설레발만은 아니었다. 또한 신라 측 역시 이 전투 직후 고구려, 그리고 결국 당나라와도 싸우게 될 것을 차츰 확신할 여러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김문영]] 참수 소동, [[웅진도독부]] 설치, [[웅령 회맹]], [[취리산 회맹]] 등.] 그 전에 후방의 위협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저항하던 백제인들 중 일부가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지배층이 아닌 일반 민중 중에서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도쿄 일대의 관동지역인 동국에 거주하던 백제인 2,000여명에게 663년부터 3년간 식량을 왜국의 조정에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인들에게 조국이던 백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다시 일어날 방법도 없었다. 왜국으로 떠나간 백제인들은 이제 돌아올 곳이 없었고, 일본 땅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인으로 동화되었다.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인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왜 조정에 등용되었다. 665년, 달솔 답발춘초(答鉢春初)는 장문성을,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는 다자이후의 방어를 위해 쌓은 오오노성과 연성의 축초 책임을 맡았다. 671년에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류·답발춘초 등은 병법에 밝다는 점을 평가해 대산하(大山下)의 관위가 주어졌다.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沙宅紹明)은 법관대보(法官大輔)에 임명되었다. 그 이에 몇몇은 의약, 오경, 음양 등에 밝다는 재능을 인정받아 관위를 받았다. 이처럼 백강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은 일본에서 전문인으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백제부흥운동]]과 고국 복귀를 바라더라도, 자력으로는 이를 구체화할 역량 같은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나머지 백제의 지배층은 [[충상]]과 같이 일부는 신라의 지배층으로 포섭되거나, [[백제부흥운동]] 과정에서 죽어나갔고, 일반 민중들은 신라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로의 동화는 결국 실패했고, [[백제]]는 약 250년 만에 다름 아닌 신라 군인이었던 [[견훤]]의 손에 [[후백제]]로 부흥하게 된다. 신라는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부여-공주 일대에 진골 귀족을, 익산 이남 전남북 지역엔 고구려 유민을, 전남 중동부에는 원신라 지역 사람들을 대거 사민했지만, 왕경인이 아니면 권력층에 진입할 수 없었던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던 탓에 지역에 이식된 귀족층은 신분 하락과 푸대접에 분노해서 신라를 버리고,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잔존했던 지역 분위기에서 실력을 획득해 성장한 호족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이런 안전 장치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성공한 백제부흥운동에 정작 백제의 원래 영토였던 옛 [[침미다례]]인 전남 서남부 영산강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고 그 이후로도 그 두 나라에게 한 번도 함락되어 본 바 없는, 말하자면 신라 중의 신라라고 할 충북 남부-경북 서남부 일대[* 여담이지만 옛 백제는 이 난공불락에 가까운 지역은 아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왕건의 고려는 어설프게 건드려보다가 크게 쓴 맛을 보고만다. 왕건의 고려마저도 이 지역은 끝내 자력으로 뚫어내진 못했다.]는 백제부흥에 동참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후백제는 옛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이후 끝내 수복하지 못했던 충북 일대도 확보하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후백제]] 참조. 요약하면, 옛 백제 지역이 '''백제유민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밀도 높은 신라의 직접 지배를 이백여 년 겪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적으로는 신라화가 크게 진행'''된 사실이, 백제 부흥을 성공시킨 이가 신라인 혈통의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일과 맞물려 발생한 아이러니였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가 망했어도 유민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어서 한참 후 고려시대인 1237년에 나주에서 [[이연년]]이 주도하여 백제 부흥을 기치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일으키지만 [[김경손]]에게 패해 진압당하고, 이후 [[대몽항쟁]] 과정 중에 소멸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