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 전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백강 전투)] [[웅진성]]에 버티고 있던 당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으나, [[유인궤]]의 제안 이후 당나라 본토에서 [[손인사]]의 7,000여명의 구원병이 도착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7,000명의 병사는 산동 해안 지역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문무왕]]이 [[김흠순]]·[[김인문(신라)|김인문]] 등 장군 28명과 대병을 동원하여 합세, [[웅진성]]으로 향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에서 합동 회의를 열어 최종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육군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손인사]]·[[유인원(당나라)|유인원]]의 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그리고 '''부여융'''[* 백제 왕자였던 그 사람 맞다. 자세한 상황은 아래에서 기술.]이 지휘하는 해군과 식량 보급선단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백강(白江)이 어느 강인가, 의 문제는 금강 하류설, 그리고 [[동진강]](東津江) 설이 대립하고 있고, 이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단 나당연합군의 이 당시 주력은 분명히 육군이었다. 당장 참가하는 인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이끌었고, 이에 반해 해군은 유인궤와 두상, 부여융 등이 이끌었다. 물론 유인궤는 나중에 가면 열전이 남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이 당시는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였고 유인궤나 두상은 참모, 별장급 인물들이었다.[* 부여군에 [[유인원기공비]]가 남아있는데, 이게 유인궤기공비가 아닌 이유는 그 때문이다.] 병력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들을 동원한 만큼 숫자는 수만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부대 중 웅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10,000명은 이미 오랜 전투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새로 투입된 병력도 손인사의 7,000명 정도라는 점을 보면 이 당시 육군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신라군이었다. [[나당연합군]]은 진격로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서 결정된 것은 부흥군의 세력 아래 있는 성으로서 지금의 서천군 임천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가림성(加林城)은 [[사비성]]에 근접해 있지만 성이 가파르고 험준한만큼 공략하려면 병력 손실이 많고 기일이 걸릴 것이므로 건너 뛰어버리고, 주류성을 직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 움직임은 부흥군 진영에도 알려졌다. 동시에 이오하라노키미 오미(廬原君 臣)가 이끄는 왜군 지원병 10,000여 명이 온다는 소식이 있자, 8월 13일 [[부여풍]]은 이를 맞이하러 백강구로 나섰다. 이 부대가 앞서 말한 신라를 친다는 27,000여명 병력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당시 파견된 부대는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 등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라군이 백제에 집중되어 정작 본토가 약할테니 이를 공격하여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의 공세를 풀어보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대 일부가 부여풍이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자 진로를 급하게 바꿔 백강구로 달려갔는지, 혹은 또 다른 파견군이 도착했는지 기록 부재로 알기가 어렵다. 8월 17일 무렵,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했고, 170여척의 당나라 해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왜군을 대비하였다. 27일 왜 해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고,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 이 당시 전황에 대해서는 한참 뒤에 671년, 신라와 당나라가 신경전을 벌일 무렵 [[설인귀]]의 편지에 문무왕이 대답한 내용에 실려있다. 백강전투가 일어나던 660년 무렵의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찾는다면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수가 있다.] 곧이어 왜 해군의 선단이 당 해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해서 물러났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ds/200911/07/23/f0017223_4af52479f395b.jpg|width=100%]]}}} || || {{{#000000 '''무경총요(武经总要)의 몽충(艨衝) 그림''' }}} || 당나라 해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함선은 170여척. 왜 함선은 400여척이었다.[* 400여척은 구당서의 기록. 앞의 주석에 있는 문무왕의 말에서는 이때 왜 함선이 '''1000여척'''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문무왕이 과장하였는 듯 하다.] 접전은 다음 날부터 벌어졌다. 먼저 신라의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했고, 왜 해군이 당나라 해군에 돌격하였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타쿠츠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백제 부흥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우선, 당나라 군대가 백강구에 도착한건 8월 17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주변 환경이나 전술 준비에 유리한데 비하여, 왜 해군은 뒤늦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기상도 살피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다. 구당서의 기록으로 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기와 화염''' 혹은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같은 언급들이 보이는데 왜군의 선단들이 [[화공]]에 당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화공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상을 살피는 일이다.[* 변인석, 『백강구 전쟁과 백제·왜 관계』pp.171-75,1994] 또 관련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진을 형성하여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왜군은 그런 모습이 부족했는데, 왕조 국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데는 세계에서 최고로 이골이 난 중국이나, 여하간에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라군에 비해 왜군은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군대를 연합한 상태라 일원론적 지휘체계에 따른 군령들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왜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선 개인적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식으로 싸우려 했으나 이에 비해 중국은 집단 전술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이 [[신석기 시대]]였던 [[조몬 시대]] 무렵에 역량이 쌓일대로 쌓인 나라다.[* 조몬 시대는 가장 오래 잡아도 [[기원전 3세기]] 쯤에 끝난다. 당대 중국은 [[전국시대]]도 이미 끝났고 [[진나라]]의 지배와 [[초한전쟁]]을 겪고 있었으니 그때부터도 이미 대규모 전쟁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난 상태. 현재 일본인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야요이인은 그때 즈음에서야 일본 열도에 진입하기 시작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한반도 또한 일본 열도보다는 아니었지만 한참 뒤쳐져 있기는 마찬가지라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94년에야 철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위만조선]]이 들어서게 된다.] 왜군의 개별적인 용약 돌진은 당군의 두꺼운 진형을 뚫지 못하였고, 당의 전선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어 좌우로 전개하여 왜 선단을 포위하자, 왜 함선들이 우왕좌왕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채 화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E6%A8%93%E8%88%B9.jpg|width=100%]]}}} || || {{{#000000 '''무경총요(武经总要)의 [[해골선]] 그림''' }}} ||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 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전장군은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중장군은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 오사(巨勢神前臣 譯語), 후장군은 아베노히케타노오미 히라부(阿倍引田臣 比邏夫)였다.] 이런 면에서 볼 경우, 백강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싸우고 잘 싸우고를 못 떠나서 양측 국가 체제의 상이함에서 비롯하는 군대의 편성 원리와 성격 차이, [[율령]](律令) 제도에 기저를 둔 국가와 군대 운영 여부에 따른 차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 출전한 장수와 사병의 출신 지역이 매우 광범위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당시 참전한 사병과 장수의 출신지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이를 중시하여 병사가 장수에 사적으로 속한 병력이 아니라 국가가 각지에서 징발한 병력이고, 장수는 조정 관원 중에서 파견하였음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이들 군대가 각지 호족의 무장력을 임시적으로 규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중·후 표현 역시 보편적인 군대 편제이고, 출정군에 '대장군'의 존재를 전하는 기록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할 경우,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고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 일단 당시 왜국이 율령제를 정착시키기 전이기는 하다. 그것만으로 전투 패배에 대한 설명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그렇지 못하게 된 부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부흥군 내부의 분열과 [[갈등]] 문제다.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도 상정할 수 있다. 어느정도 [[전투력]] 저하의 요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함선의 차이에 대한 고려다. 당나라의 여러 주력함들은 견고한 대형 군선이고, 몽충은 높고 커서 접근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각|배끼리 부딪쳐 상대방 배를 부수는 방법]]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고, [[해골선]]은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 부분을 장치하여 접근전에서 유리하게 고안된 군선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군의 함선들은 소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강 전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은 이 전투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전투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회전'''이라고까지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여, 마침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처럼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양자간에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다.[* 일본 쪽에서 임진왜란을 언급할때, 정작 전쟁터이자 그 역할도 적지 않았던 조선을 배제하고, 마치 일본과 [[명나라]]와의 양자 대결처럼 보려는 시각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 전투를 고비로 왜국 세력이 고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이는 한일 관계사에서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 후에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일본사 전개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게는 이 전투는 별로 비중이랄 게 없는 전투였다.[* 애시당초 중세 중국 세력의 끝을 모르는 미칠듯한 서방 진출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저지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탈라스 전투]] 마저도 막상 그 당시 당나라 입장에선 별 비중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인 [[고선지]]는 처벌도 안 받았다. 하물며 이 보다 더 적은 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백강 전투가 당나라 입장에서 지나치게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이는 신라에게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고,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수천여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강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부작용이 있다. 백강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8월 13일, 신라군이 주축인 육군은 주류성 지역에 도착했고, 8월 17일부터 성을 에워싸고 공략전을 펼쳤다. 일본군이 백강구에 도착한 것은 이때부터 10일 후였다. 또 부여풍은 신라군이 도착한 13일 휘하의 일부 왜군과 성에서 빠져나가 왜군을 맞이하러 떠났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왜국의 지원군과 연결, 성 안팎에서 협공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강 전투에서 부여풍은 대패했고, 주류성은 며칠 더 버텨보았지만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9월 7일 농성하던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항복하였다. 주류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백제의 여러 성도 잇따라 투항해버렸고,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 달솔(達率) 곡나진수(谷那晉水) 및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목소귀자(木素貴子) 등이 많은 백제인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례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 백강 전투 당시 [[탐라]] 국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구당서 유인궤전). 이 말은 탐라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탐라가 [[동성왕]] 시기에 백제에 귀복하였고, 백제 멸망 후인 661년 5월에는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해 8월에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고, 문무왕 2년에는 탐라국주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백제 멸망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탐라국 나름으로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백강 전투 현장에 탐라인이 있었음은 탐라인이 백제와 왜국 측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탐라국사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보아 군사적인 참여는 아닌것으로 보이고, 백제 부흥군에 보낸 사절로 보인다. [[백제부흥운동]]의 핵심이었던 [[복신]]이 비참하게 죽었고, 왜국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박살나며 주류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실패가 결정되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전면에 내세워 압박하자, 마침내 연말에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 만 3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7세기의 백제부흥운동은 일단 끝이 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