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부여풍의 사정 ====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부여풍은 왜국에서 십수년을 보내며 긴 시간을 지나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 노태돈의 말로는 전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왕족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바지사장|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부흥군을 이끌었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근, 포 1천단, 쌀종자 3천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그가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 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은 중심지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옮기려 시도했다. 피성은 [[김제]]로 비정된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학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사이노무라지(狹井連)[* 이름은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와 의논해 말하기를 > >“이곳 주유(州柔)[* 주류성과 같다.]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 >이에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결국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너무 피성이 신라군 점령지에서 가까워 바로 위협을 받게 되자 결국 2달만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장|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백제부흥을 도우러 온 왜군 장수가 반대하였다. 타쿠츠 등은 5,000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 장수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복신보단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아무리 복신이 권한이 막강하다 해도 부여풍이 일단은 백제부흥군의 왕이니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의견을 강하게 밀어볼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그리고 위 기록을 보면 주류성이 농사짓기 안 좋다는 점은 [[팩트]]였던 듯 하니까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건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이는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에게 2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 이름은 누락됐다.]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 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국과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당시 [[평양성]]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토착 기반 세력을 지닌 복신보다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복신을 제거하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 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 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 부흥군의 상호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와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