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복신의 사정 ==== 해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은 바로 복신이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백제 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였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복무한데다, 심지어 무왕의 조카라는 고위 왕족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그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듯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이 일본서기 권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국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환국과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덤으로 왜국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연계 호응한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