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2차 고구려-당 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 당나라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백제와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집어삼키기 위한 교두보 마련이었다. 백제 공략전에서 해로를 통한 작전이 성공하였고, 병력 손실도 경미한데다, 병사들의 사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당고종은 660년 12월 15일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현경(顯慶) 3년, 고구려 보장왕때 다시 명진(名振)을 보내어 설인귀(薜仁貴)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천자가 백제를 평정하였다. 이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좌효위대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패강(浿江)·요동(遼東)·평양도(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 >용삭(龍朔) 원년(元年), 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蔚州刺史李君球建言: 「高麗小醜, 何至傾中國事之? 有如高麗旣滅, 必發兵以守, 少發則威不振, 多發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苦邀, 帝乃止.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 定方解而歸. >---- >'''《[[신당서]]》 권 제220 열전 제145 동이''' 이어서 661년 정월 하남, 하북 등지에서 모병한 44,000여 명을 평양 누방(鏤方) 방면으로 진발하게 하고, 같은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위구르]] 제국) 등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4월에 당고종은 튀르크계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방효태를 옥저도행군총관, 정명진을 루방도행군 총관, 소사업을 부여도행군 총관으로 삼아 6개 도행군에 총 35도(道)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아울러 6월,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신라)|김인문]]을 귀국시켜 신라의 문무왕에게 군사작전 날짜를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 달에 부왕인 무열왕이 병사함에 따라 바로 즉위한 직후였지만, 문무왕은 빠르게 응해 7월 17일,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한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어 8월에는 스스로 제장을 거느리고 남천주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오늘날의 [[대전]] 일대인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유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때,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의 유인원도 일부 당군을 끌고 해로를 통해 혜포(鞋浦)로 와서 그곳에서 남천주로 나아가 신라군과 화합하였다. 다만 신라군은 백제부흥군과 싸워서 실효지배 영역을 넓히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661년 가을까지 대전 근처에서 멈춘 채로 있었고 더 이상의 고구려 방면 출병에는 소극적이었다. 당나라군의 행로나 전쟁 양상은 기록이 적어 확인하기 힘들다. 소정방이 661년 8월, 패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하며, 평양성을 포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보다 뒤인 9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연남생]](淵男生)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의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소정방은 당 본토에서 요동으로 진군하여 압록강을 돌파하여 간 것이 아니라, 해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는 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라면 계필하력의 움직임은 소정방의 움직임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고구려 방어군을 끌어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거란과 연합하여 서쪽으로 당을 역습하였고 이어 철륵도 같이 연동하여 당나라군을 전멸시켜버린다. 이에 철륵 출신인 계필하력이 급히 철군하여 싸우러 나갔다. 소정방은 갑자기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어 버렸고, 그 상태에서 평양성 포위를 지속하였다.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도 않았고,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식량 공급이 매우 빈곤해졌다. 이에 당고종의 사신에게서 칙서를 받은 문무왕이 김유신을 보내어 쌀 4,000석, 조 22,000석을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김유신은 최고 권력자이자 이제 완연한 노장이었지만 강건하게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고, 또한 웅진성의 당군이 식량이 바닥나자 신라는 전력을 기울여 군대와 보급품을 보냈다. 신라가 보급을 위해 필사적일 무렵, 전열을 가다듬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662년 시점에서는 루방도행군 사령관인 정명진과 그의 부장 양사선[* 양사선의 묘지명을 확인해보면 루방도행군 역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도행군이 와해될만큼의 대패를 당한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누방도행군이 전쟁을 치루는데, 큰 봉황새가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하늘을 날던 날개가 떨어져 드리우고, 큰 고기가 길을 잃고 헤메어 큰 파도에 비늘이 떨어지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서 58세의 나이인 661년 10월 16일에 양사선이 군대에서 죽어서 묻혔다.], 패강 도행군 사령관이자 병부상서 임아상이 진중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된다.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대동강 인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은 사수(합정강 부근)까지 전진해 왔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 대패하고 전군이 몰살당하며 총관 방효태도 사수 전투에서 전사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가장 주력인 1개는 무력화, 2개는 사령관을 잃고 1개는 아예 전멸했으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고려[* 고구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구)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662년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백주자사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에서 싸웠다. '''그의 군대가 전멸하였고, 방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위기에 빠진 평양도행군에게 신라의 지원은 너무나 절실하였고, 간신히 퇴로를 확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정방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신라의 지원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신라군은 눈으로 큰 곤경에 처했고, 고구려군이 출몰하여 행군이 더뎌졌던 상황이었다. 당의 요청에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강행군하여 662년 2월 6일 당군 진영에 양곡을 운송했다. 신라군의 식량 공급을 받은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간신히 철군하였고, 신라군도 압록강 이남에서 철병하였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내몽골 초원지대의 지배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남방에서는 신라의 뒤통수를 막아줄 백제가 멸망했다. 제2차 여수전쟁 이래 평양 수도권은 수차례 적의 직공을 받아 전장터가 되었고, 이는 고구려가 힘들여 확보, 구축한 대동강 연안 평양평야가 제대로 생산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 때는 부흥군과 왜가 신라를 막아줬지만 이듬해에는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에 작살나버리니 이후 신라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전쟁 확대를 피하며 당나라의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 등 기존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의 친선 의사를 표한다. 이 상황에서 기세가 살아오른 것은 바로 백제 부흥군이었다. 부흥군이 기세가 오르자 웅진성의 당나라 군대는 고립되었고, 본국인 중국 본토와의 연락,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믿을 것은 우방인 신라의 현지 보급이었는데, 신라와의 교통로마저 백제 부흥군에게 자주 차단당하는 형편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세를 부흥군은 한껏 드러내었고, [[부여풍]]과 [[복신]]은 [[웅진성]]의 [[유인원(당나라)|유인원]]에게 '''"언제 당나라로 돌아갈 것이냐, 마땅히 환송하겠다."'''면서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희롱하는 동시에 역으로 평화적 귀국을 보장하겠으니, 철병하라는 제의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아무튼 당나라는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고, 확대된 백제인의 저항을 어떻게 진압할지가 문제였다. [[당고종]]은 [[웅진성]]에 틀어박혀 있는 [[유인원(당나라)|유인원]]에게 칙서를 보내, 평양의 당군이 회군하는데 웅진성만 홀로 버티기는 어려우니 신라로 철수하고, 다시 신라와 상의하여 (당나라 본토로) 귀환하여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연히 대다수 장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라 했다. 만약 이때 당군이 철수했다면 전개가 묘하게 돌아갔을텐데,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 [[유인궤]]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철수하면 순식간에 백제는 다시 일어날 테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게 되어, 결국 당나라의 대 동방 전략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고구려를 병탄하길 원한다면 먼저 백제를 멸해야 한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켜 배와 가슴을 눌러야 한다. 즉 고구려의 뒤뜰을 압박하여야 한다. 신라로 들어가면 당군은 한갓 빌붙어 지내는 식객 따위에 지나지 않게된다. 백제 지역은 능히 제압할 수 있다. 병력을 증파해달라.''' >---- >유인궤 662년 7월, [[유인궤]]는 신라군과 연계하여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백제 부흥군의 포위망을 뚫고 신라에서 웅진성에 이르는 수송로를 재차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보급품이 조달되자 [[웅진성]]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당나라 조정은 [[손인사]](孫仁師)를 장수로 하여 7,000명의 지원병을 증파하였다. [[유인궤]]의 제안과 활약으로 당나라의 백제 주둔은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