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 그 사이 백강에서는 백제군이 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였는데, 당군이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고, 양군이 접전하여 백제군이 패배하였다. 만조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사비성 부근까지 나아갔고, 이곳에서 서진하는 신라군과 만났다. 그런데 양군이 합류하자마자 사단이 벌어졌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한 기일을 하루 넘긴 11일에 도착했다고 역정을 내며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책임을 물어 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김유신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대장군(大將軍)은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이 당시 삼국사기의 표현으로는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고 할 정도. 이런 기세를 보고 소정방의 우장(右將)이었던 [[동보량]](董寶亮)이 슬쩍 소정방의 발을 밞고 "이러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키겠음.' 하고 주의를 주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소정방은 나름 기선제압을 해보겠다고 강하게 나섰지만, 신라 측이 저렇게 강하게 나오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당동맹의 주목표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임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당나라 입장에서 백제는 그 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먼저 치워둬야 할 걸림돌 개념이었다. 기껏 13만 대군을 고대시대에는 적잖은 리스크를 안아야하는 원양항해까지 해가며 신라에 투자했는데, 상대가 고작 약속날짜 하루이틀 못 지켰다고 동맹 자체가 틀어져버리면 그야말로 엄청난 손해다. 당 단독으로는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엄청난 피해가 있다는걸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으로 알고 있었을테니 신라와 선이 끊기면 한반도에서 새 파트너를 찾아야하는데, 남은건 백제 뿐이고 자신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당의 손을 백제가 잡을리 만무하므로 고구려 원정은 기약이 없어진다.][* 당장 과거 고조선 멸망전만 봐도 장군 순채와 양복이 서로 사사로운 일로 다투어 고조선 정벌이 틀어지고 한무제의 위신에 손상이 가자 한무제가 분노하여 둘다에게 벌을 내린바가 있다. 소정방은 고구려 멸망에 진심인 황제의 명을 받고 온 만큼 자존심 챙기는 것 못지 않게 목적 달성도 반드시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일단 상황을 봉합한 뒤 7월 12일, 양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사비성) 들판에 진을 쳤다. 13일에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효]]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은 과거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문주왕]]이 피신했던 곳인만큼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지형적으로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해 있어 개활지인 사비성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서로 의지하는 기각지세를 이루어 침공군에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 때 백제는 수도권만 공격받은 것이라서 여전히 지방에는 수만명의 지방군이 있었으므로[* 실제로 나중에 [[흑치상지]]가 백제부흥군을 모으자 백제 멸망 후 2달밖에 안 지난 660년 9월 시점에 금방 3만명이 모인다. 새로 [[징병]]한 병력이라기엔 너무 텀이 짧으므로 이 3만은 기존에 편성돼 있던 군사들일 가능성이 높다.] 의자왕은 최대한 버텨보는 게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왕이 사비성을 떠나자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사비성에 남아 있던 왕자 [[부여태]]가 이제 자신이 백제왕이라 자칭하며 즉위하였으나, 태자 [[부여효]]의 아들들이 불안을 느껴 항복하였고, 이 항복을 막지 못한 부여태도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렵다 판단해 항복하였다. 그리고, 7월 18일에는 웅진성의 [[의자왕]]과 [[부여효]]도 항복하였다. [[웅진성]]에 들어간지 단 5일만이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포위해서 크게 싸워보기도 전에 너무 빨리 항복한 것에 가까운데, 웅진성 안에서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인물이 사실상 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항복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이 날은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부터 겨우 10여 일만인 18일이었다.(2011년 [[공산성]] 발굴과정에서 갑옷과 화살촉 등이 대량출토되면서 실제는 일련의 전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백제]]는 이로써 멸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