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황산벌 전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황산벌 전투)]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계백장군_영정.jpg|width=100%]]}}} || || {{{#000000 '''[[계백]](階伯)''' }}} || 전쟁에 나서기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며 자신의 일가를 몰살하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나섰다.[* [[권근]]이 계백의 이 행동을 비난했고, [[안정복]]은 권근이 또 병법을 모른다면서 역으로 비난했다.] 계백의 목적은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최대한 저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후방에서 전력을 추스르고 서쪽의 수군에 대한 대비도 하겠다는 계획이었으므로 얼마나 오래 막느냐가 관건이지, 완전히 신라군을 막고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황산벌에 세 개의 군영을 설치해 서로 의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이었던 계백이 각기 하나씩 군영을 지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문기, 『사비시대의 백제의 군사조직과 그 운용』] 전투를 이끌던 중심은 계백이었다. 계백의 비장한 태도와 함께 백제군도 용맹하게 싸웠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라군은 화랑 [[반굴]]과 [[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 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크게 소모되어 있던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3영이 붕괴되었으며,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만이 사로잡히고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하루에 불과하다. 약속된 합류 일자보다 늦춰서 최소한의 성과는 냈지만 그게 겨우 하루 늦춘 정도라는 점에서 백제군의 전략은 실패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방어 진지도 아닌 3개의 군영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라의 지휘관이 지난 1세기 동안 신라를 지탱하던 희대의 명장 김유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