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왜국의 입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4.att.hudong.com/01000000000000119091295582382.jpg|width=100%]]}}} || || {{{#000000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 }}} || 왜 조정에서는 6세기 중엽부터 [[불교]]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유력 귀족들 간에 갈등이 벌어졌는데, 불교 수용에 반대하던 [[모노노베]](物部)씨와 수용을 찬성하던 [[소가]](蘇我)씨가 각각 양 편을 대표하는 집단으로서 대립하였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 주로 5세기에서 6세기 중기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 혹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을 말한다. 애초에 소가씨 자체도 한반도계 도래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세력을 휘하에 포섭하면서 확대를 거듭해 모노노베씨를 타도하였다. 이후 소가씨는 왜 조정의 대표적 귀족세력으로 대두하였고, 명망있던 [[쇼토쿠 태자]](聖德 太子) 사후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 한창이던 645년 6월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재위기에, 왜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졌다. 소가씨의 전횡에 위협을 느끼고 불만을 품은 황족과 귀족들이 합세, [[고교쿠 덴노]]의 아들인 [[덴지 덴노|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 皇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가 소가씨의 수장인 [[소가노 이루카]](蘇我 入鹿)를 죽이고 소가씨를 몰아내었다([[을사의 변]]). 이 정변으로 고교쿠 덴노가 퇴위하였고, 그녀의 동생인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가 즉위하였다. 코토쿠 덴노는 실권자였던 조카 나카노오에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후의 [[덴지 덴노]](天智 天皇)이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조정의 실권을 잡은 후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을 단행하였다. 복잡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느끼면서, 개신 정권은 653년, 654년에 제2차, 3차 [[견당사]](遣唐使)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교류하면서 신라와도 어느 정도 교섭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654년 당고종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출병하여 신라를 구원하라 요청하였으나, 왜 조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신라를 구원하러 간다면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는 파탄될 것이다. 단 신라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삼국간의 상쟁에서도 한발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왜 조정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지켜보았고, 신라는 어떻게 해서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입장을 선회시키려고 노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