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당나라의 입장 ==== [[고구려-당 전쟁#s-3|1차 고구려 원정]] 실패 후, [[태종(당)|당태종]]은 곧바로 [[설연타]] 정벌전에 착수했다. [[토번]]의 세력이 절정으로 치닫기 이전에, [[설연타]]야말로 당의 [[수도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나중에 다시 [[고구려]]로 진격한다고 해도 설연타는 반드시 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646년 6월, 당나라는 대규모 군단을 동원, 설연타를 대파하여 다시는 세를 떨치지 못할 지경까지 만들었다. 이어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 재개를 논의하였고, 일전과는 조금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대규모 군단으로 직접적으로 강대한 타격을 주는 전략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용, 해로나 육로로 고구려를 기습하고, 반격하면 치고 빠지는 형태로 [[소모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647년 5월, [[이세적]]은 3,000명의 병사와 영주도독부의 병력을 동원해 남소성 등 소하자 유역 일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고,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른 뒤에 신속히 퇴각하였다. 7월에는 [[해군]] 10,000여 명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 지대로 침입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석성]]을 공략하고, [[적리성]](積利城)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 이듬해 648년 4월에는 당의 해군이 [[압록강]] 하구로 진입, 100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가 병사 30,000명을 보내어 강력하게 방어하려고 하자, 당군은 서둘러 철군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 당태종은 648년 8월 재차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30만 대군을 동원해 일거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고, [[방현령]]이 이는 무익하며 [[시망]]인 일이라고 반대하였지만 무시당했다. 바로 그 무렵,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