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신라의 정변 - [[비담의 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비담의 난)]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화사진첩.jpg|width=100%]]}}} || || {{{#000000 '''[[김유신]](金庾信)''' }}} || 백제와 고구려, 왜국의 압박에 찌부라져 있던 상황에서, 믿었던 당나라의 동진마저도 고구려에 저지당했고, 이 과정에서 백제의 대침략까지 당한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이 때 백제와 달리 당을 지원한 것이 신뢰도를 쌓아서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의 세 나라 가운데 신라를 최종 파트너로 삼는 중요한 명분과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건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당장에는 신라가 아무 이득이 없이 피해만 본 상황이었다. 이에 신라 내부에서 [[상대등]] [[비담]]을 비롯한 귀족들은 선덕여왕 정부의 국가운영에 불만을 가지고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647년 초, [[비담의 난]]과 같은 대규모 내분이 폭발하였다. 비담의 난은 김유신의 심리전이 성공해 10여일만에 진압되었으나 [[선덕여왕]]이 이 와중에 병으로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계승하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진골 출신의 세력의 부각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출신의 지방 출신 진골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지방세력과 하위인사를 소집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고, 나아가 이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규합하여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 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 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 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 관서 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 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뒤에 보듯 중국화가 훨씬 진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