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신라통일론'의 전개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것은 당대의 신라인들이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다는 [[삼한일통]] 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식은 7세기 종반에 등장하였다. 신라 조정은 668년 [[평양성]]을 공략한 후 곧이어 고구려 유민들이 일으킨 반당적 성격의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였고, 고구려 유민 집단을 금마저(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안치하여 괴뢰국인 [[보덕국]]을 만들고, 고구려 유민들이 직접 왕으로 추대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고구려'는 684년에 해체되었고,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안승과 함께 신라에 완전 흡수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주민과 지역은 669년부터 벌인 당과의 전쟁을 통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이는 신라 조정이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자부하는 데 있어 객관적 요소가 되었다. 이들 유민들은 통합 초기 20여년간은 대문의 반란과 같이 다소간의 충돌도 있었지만, 680년대쯤부터는 신라 영역 내의 옛 고구려인과 백제인들도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에 순응하여 이후 200여년 동안 구삼국 유민의식에 기반한 다툼은 거의 사라진다. 중대 신라 왕실은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태종 무열왕|무열왕]]의 시호 [[태종]]이 [[태종(당)|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위|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 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41/2006/11/19/news1200611192002530.jpg|width=100%]]}}} || || {{{#000000 '''최치원''' }}} || 신라인들의 삼한일통 의식은 다름 아닌 [[발해]]의 등장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했다 선언한 지 30여년이 지난 698년, 옛 고구려 영토 중에서도 머나먼 동북쪽 동모산에서 세워진 발해는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은 [[고왕|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수여하였다. 이 대아찬은 신라의 17등 관등에서 제5등에 해당하는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한 셈인데, 당시까지 신라가 발해의 실체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임에도 고려란 국호를 대외적으론 쓸 수가 없었는데, 당연히 당과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이었다. 물론 발해가 이런 뼈아픈 견제를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현대에서도 중화민국이 그 국호를 제대로 국제사회에서 쓸 수 없는데 좋아하던가? 다만 이것 때문에 남북한이 발해사를 자국사로 주장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바로 그랬기에 신라의 삼국통일 주장이 적어도 국제무대에서 더욱 강하게 인정받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다만 혹한으로 인해 상당수 병사들이 얼어죽는 등 피해가 심해서 전투 없이 도중에 회군, 두 국가 간에 뚜렷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라군이 애초부터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주기식 명분만 세운 후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도중에 철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양국은 시종일관 대결만 하지 않고 적잖은 교류가 있긴 있었다. 발해는 때문에 일본과의 교섭에서만 자국을 '''고려'''라 칭하였는데, 이는 발해가 적어도 국제 사회에서는 당과 신라의 강력한 주장에 밀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국력이 만만찮은 발해를 온갖 외교적 수단으로 고려를 자칭하지 못할 정도로 찍어눌러 인정받은 삼한일통 의식이, 신라 지배층에서 계속 견지되었음은 신라 하대의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지난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890년 세워짐] 中.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924년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세워짐] 中. 어느 면에서는 발해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신라의 삼한일통론에 도전하고, 당나라에서의 쟁장(爭長) 사건[* 발해 왕자 [[대봉예]]가 발해 사신의 서열이 신라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 [[동사강목]]에서는 이 일에 대해 "발해가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 고 말했다. 일 자체는 당나라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등으로 신라를 압박함에 따라, 신라 지배층에서는 신라통일론을 더 강조하게 되었고, 아울러 발해를 고구려의 직접적 후신이 아닌 말갈족의 나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을 수 있다.[* 『三國史記』의 靺鞨 認識 -통일기 신라인의 인식을 매개로- 이강래(李康來)] 이후에도 고려시대에 간행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삼국 통합 사실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 중 삼국사기는 관찬 정사로서 고려왕조의 공식 사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5세기]] [[조선]](朝鮮)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변화된 면을 보여주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에서 비롯하는 일원적인 역사 체계를 정립하여 삼국 유민 의식 청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서의 구성에서 삼국기 다음에 신라기를 설정하여 삼국 병립기와 [[문무왕]]대 이후의 통일기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그 의의를 뚜렷이 인식했던 것. 신라통일론을 긍정하는 동국통감의 구성은 그 뒤 조선 시대의 각종 사서에 기본적으로 이어졌다. [[18세기]]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통일도'를 실어 신라통일론을 이어갔으며 발해사는 수록하기는 했지만 부록처럼 취급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를 정통으로 처리한 것은 조선 후기 [[강목]]체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발해고]]를 편찬한 [[유득공]]처럼 신라통일론을 어느 정도 부정하는 목소리가 조선 후기에 등장했지만 동사강목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유득공의 의견은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주된 의견은 아니었고 남북국시대론은 현대에 들어서야 크게 확산되었다. 신라통일론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전근대 인식에 대한 예우 차원 및 표면상으로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남북한관계]]로 인한 정치적 이유 등으로 꾸준히 견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다수의 개설서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취하고 있다. [[남북국시대]]론을 취함과 동시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서술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21세기]]를 들어서는 이 쪽이 교육 과정에서 주류에 가깝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일제강점기 등 민족주의 사학이 심화되던 시절에는 통일론 비판이 강했었다. 이에 대한 재반론 및 통일론의 논리는 다음의 링크들을 참고하자.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442929921|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上)]]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442930482|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下)]] [[http://lighton.egloos.com/m/2910400|과연 삼한일통 의식은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인가? - 上]] [[http://lighton.egloos.com/m/2910539|과연 삼한일통 의식은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인가? - 下]] [[노태돈]]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24/2017042400005.html|비판에 대한 노태돈 교수의 답변]]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442845552|신라의 백제통합론에 대한 비판]] 나당전쟁연구의 이상훈 교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