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설연타]]의 움직임 === 당군은 전쟁 초기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수나라에 비해 나은 성과를 보이나 이내 [[신성#s-5]], 건안성,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한 때, 당나라에 있어 이변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몽골 고원의 강자였던 [[설연타]]의 개입이 그것이었다. 설연타는 [[튀르크]]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철륵]](鐵勒)의 한 부족으로, 북방의 최강자였던 [[돌궐]]이 당나라의 힘에 의해 망해버린 뒤 강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공격을 하게 됨으로서, 당나라의 심장부인 [[관중#s-4|관중 지역]]의 방어가 약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당태종 역시 그 사실을 알아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 전에 설연타의 진주가한(進駐可汗)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지금 고구려 작살내러 가는데, 그 사이에 쳐들어오고 싶으면 함 해봐."'''라는, 대단히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돌궐]] 사람인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여 설연타를 막아내게 하였다. [[고구려-당 전쟁]] 발발 이후 [[연개소문]]은 [[말갈]] 사람을 보내 [[설연타]]의 참전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설연타는 645년 9월, 진주가한이 사망하고 난 뒤, 발작(拔灼)이라는 인물이 다른 형제인 예망(曳莽)을 습격, 살해하고 새로운 가한,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당군이 몰랐을 리가 없다. 새 가한의 동향은 의심이 대상이 될 만하고, 특히 고구려는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게다가 점점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동 평야의 기온이 떨어졌고 풀이 시들고 서리가 내렸다. [[안시성]]은 [[철옹성]]이었으며 [[신성#s-5]]과 건안성의 10만의 고구려군 역시 당군의 진격로와 군량 수송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당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하였다. 설연타의 동향이 문제가 되는 만큼, 당군은 신속한 철군이 요구되었다. 당군은 추위 속에 [[요하]] 하류의 뻘밭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고구려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고생 끝에 [[태종(당)|당태종]]은 12월 14일 무렵 [[산서성]]의 [[태원]]에 도착하였고, 그 사이에 [[설연타]]가 [[오르도스]]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에서 전인회(田仁會)가 급파되어 미리 파견되어 있던 집실사력과 힘을 합쳐 [[설연타]] 군대를 격파하였고, 퇴각하던 설연타 군은 재차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제 당군은 고구려 정벌이 문제가 아니라 설연타의 압박을 저지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 되었다. 이로서 1차 고구려-당 전쟁은 끝이 났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대실패했다. 열흘만의 [[요동성]] 함락과 [[주필산 전투]] 등 수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당군의 용맹과 분전을 유리하게 과장하는 성향과 수사를 제외하고 보면 그냥 요동 방어선 표피에서 거점 몇 개를 점령하다가 실패한 수준에 불과하다.] [[신성#s-5]], 건안성, [[안시성]]을 필두로 하는 요동 방어선 공략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서, 당나라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설연타]]와 싸워야만 했다. [[태종(당)|당태종]]은 [[위징]]이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이 원정을 나서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 후회하였고, [[이정(당나라)|이정]]은 강하왕 [[이도종]]의 계획, 즉 [[오골성]]을 치고 [[평양성]]을 치는 계책을 써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간에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태종은 패배를 설욕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수양제]]와 같은 막무가내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