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연개소문과 김춘추 === > 新羅謀伐百濟遣 金春秋 乞師不従 >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冬王將伐百濟以報 大耶 之役乃遣伊湌 金春秋 於高句麗以請師初 大耶 之敗也都督 品釋 之妻死焉是 春秋 之女也 春秋 聞之倚柱而立終日不瞬人物過前而不之省旣而言曰嗟乎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便詣王曰臣願奉使高句麗請兵以報怨於百濟王許之高句麗王高臧素聞 春秋 之名嚴兵衛而後見之 春秋 進言曰今百濟無道爲長蛇封豕以侵軼我封疆寡君願得大國兵馬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麗王謂曰 竹嶺 本是我地分汝若還 竹嶺 西北之地兵可出焉 春秋 對曰臣奉君命乞師大王無意救患以善鄰伹 威劫行人以要歸 地臣有死而已不知其他 臧 怒其言之不遜囚 之別館 春秋 潛使人告本國王王命大將軍 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 行軍過 漢江 入高句麗南境麗王聞之放 春秋 以還 >겨울에 왕이 앞으로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에서의 싸움을 갚고자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서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가 패하였을 때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 >고구려의 왕인 [[보장왕|고장(高臧)]]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의 임금이 대국(大國)의 군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 >'''“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을 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 >고장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본국의 왕에게 알렸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a-arts.knaa.or.kr/P0000052_1470.jpg|width=100%]]}}} || || {{{#000000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 || 이 당시 김춘추는 고구려 수뇌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이 그간의 항쟁을 중지하고, 나아가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구원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원하자 김춘추는 거부했고, 이에 김춘추가 구금되자 신라 조정과 김유신은 분개하여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출격, 이에 보장왕은 김춘추를 석방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보장왕의 태도는 연개소문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 김춘추의 의도에 대해서는, 정변이라는 유혈 내분을 겪고 현재도 불안정한 면이 있는데다, 당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고구려에 동맹을 청해, 주력을 당의 침공에 대비하게 만듦으로서 신라의 위협을 덜게 하려는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정변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은 고구려의 십수 년이 넘는 천리장성 공사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이 상황에서 왜 고구려 조정은 제발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을 거부했을까? 642년까지 신라가 백제보다도 당나라와 '특별하게' 더 가깝다고 볼 근거는 없는데, 642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되려 백제가 신라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643년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당에게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하자, 당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이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와 고구려가 싸우던 상황에서, 신라가 자신들의 뒤를 쳐서 땅 500리를 탈취했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제안을 따른다면 신라 - 고구려 관계는 5세기 중반 이전의 형세로, 즉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와 협력하던 과거의 형세로 돌아가는 모양이 된다. 그리고 당나라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신라가 후방을 위협하는 문제는 백제와 말갈, 왜를 이용해 신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삼국시대 말기,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두 거물들의 회담은 이렇게 끝났다. 신라는 절망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당나라에 절대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으며, 이는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돌궐, 말갈, 백제, 왜를 통해 남과 북,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을 제어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십자형 판도를 이루게 된다. 이제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라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단순히 당나라와 고구려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각국들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끼치는 국제전의 성격으로 전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