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연개소문의 정변 === >冬十月 蓋蘇文 弑王 >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구려|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 이리가수미(大臣 伊梨柯須彌)가 [[영류왕|대왕]]과 [[이리거세사]](伊梨渠世事) 등 180여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보장왕|아들]]을 왕으로 삼고 자기와 같은 성씨(姓氏)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부르기를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스스로 이르길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홀렸다. 타고난 바는 잔인하고 거칠었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서 섬을 얻을 수 없었다.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옳지 않으면 비록 못하게 하여도 아쉬움이 없다 하였다. 뭇 사람들이 슬피 여겨서 드디어 자리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더불어 말을 나누어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깨닫고 여러 곳을 모두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그시체를 찢어 여러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임금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중서령(中書令)를 합한 것과 같은 벼슬이라 이른다. >---- >'''《[[신당서]]》 권 제220 열전 제145 동이''' 신당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이었고, 구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서부대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당나라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정변 발발 한 달 뒤인 11월에 보낸 보고문에서 '고려 동부대인 천개소문' 등등의 언급을 하고 있으므로 동부대인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보면 정변 전 연개소문의 위치는 동부대인으로 보인다. [[노태돈]]은 동부대인이 '동부 소속의 대인' 이 아니라, '동부를 관장하는 장' 이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섭직을 거부한 것은 연씨 집안이 동부의 병권을 오랫동안 장악한데 대한 견제와 반발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동부의 군병을 장악해온 연개소문 집안의 연고권과 위세를 부정할 수 없어, 그의 섭직에 동의하였다는 식이였다. 여하간에 이러한 귀족 회의의 견제를 뚫어버리고 그 자리에 오른 연개소문의 세력은 오히려 더욱 강력해졌고, 그 기세에 위협을 느낀 귀족, 그리고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은 '이리가수미'로 기록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는 와중에 '이리거세사'를 죽였다는 언급에서 나오는 이리거세사는 같은 이리(伊梨) 씨로 보이며, 그렇다면 연씨 집안 내에서도 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해 초에 조정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시역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시도는 연개소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중앙 정계에서 격리시키거나 혹은 동부 대신 직을 내놓게 하려는 등의 시도로 보이는데, 자신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하면서 여러 대신과 고위 관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식이 열리자마자 정변이 시작되었고 왕궁까지 무자비하게 유린되었다. 수도에서는 정변과 함께 순식간에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고구려를 장악한다. [[양만춘]](楊萬春)으로 알려진[* 정사에 나오는 이름이 아니다. 야사에서도 훨씬 후세에나 등장하는 이름이다.] [[안시성주]]가 이 때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다는 소문이 당태종에 의해 언급되기도 한다. 이렇게 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남쪽에서 [[태종 무열왕|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왔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