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고구려의 반응 === 수나라가 국제정세 판을 새로 짜면서 가장 먼저 충돌한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쭉 팽창적인 정책을 펼쳤다. [[6세기]] 중반의 혼란상을 수습하고 융성하던 시절의 [[돌궐]]이나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 등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다. 수나라가 들어서면서도 이 기조를 유지하며 동서 6천리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소규모의 공세를 가하거나, 수나라 내부에 공작을 시도하고, 기술을 빼냈으며 내부적으로는 중흥군주 [[평원왕]]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에 수문제는 노하여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면 어떠하고, 고려의 인구가 진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라는[* 근데 진의 집계 인구는 당시 50만 가구 정도로 앞으로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멸망 당시 70만 가구를 찍은 고구려가 모로 봐도 더 강대한 상대였다. 실제 인구와 잠재력은 진나라가 우위였겠지만 당장 손이 닿는 동원력이나 내부적인 결속력 등에서 고구려가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장강과 달리 요하는 고구려 쪽에 산맥이 마주 서 있고, 현재와 달리 수시로 범람하여, 최대 강변 1km를 갯벌처럼 만들어버려 도강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등 장강보다 훨씬 강력한 천연 방어선이었다.] 국서를 보내는 등 고구려를 상대로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은 속말[[말갈]]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에 포섭되는 등 동진하는 수나라의 위협을 좌시할 수 없었고, 이에 [[말갈]]과 [[거란]] 등을 동원해 [[요서]]를 선제 공격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p02.jpg|width=100%]]}}} || 이 싸움에서 수나라측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고구려군을 막아냈으며 이어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거병하여 고구려의 서쪽을 공격하였으나 요서와 서해에서 전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