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6세기 중엽설 === 삼국 간의 전쟁이 [[6세기]] 중엽,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어 통일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시각이다. 즉, 신라가 [[관산성 전투]] 등으로 한강 유역과 삼국의 역관계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고(대표적으로 [[나제동맹]]의 붕괴), 이는 6세기 중엽 이후 전쟁은 성숙된 집권국가들 간의 격렬한 쟁패전으로 이어졌으며, 일방의 군사적 승리는 즉각 상대국 내부의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역 지배의 강화에 따른 삼국의 새로운 전쟁 양상이, 수·당 왕조의 출현 이후의 변화와 결부되어 국제적인 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식이다.[* 이강래,『삼국의 성립과 영역확장』 『한국사』3 pp.228-30, 1994] 이 설은 주요한 역사적 진전의 동인을 삼국 내부의 발전에서, 구체적으로는 영역 국가 체제로의 발전에서 찾은 견해로, 내재적 발전론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첫번째 설과 동일하다. 실제 신라의 6세기 대약진은 삼국의 역관계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뒤늦게 이 무렵에 영역 국가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삼국 사이의 전쟁의 양상도 더 많은 영토와 인민의 쟁취를 위해 대규모화하고 빈번해지며, 전쟁의 결과가 한 국가나 집권 세력의 안위와 직결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미 그 전부터 영역 국가 체제로의 진전을 계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나 5세기가 아닌 6세기 중엽설을 내세운다면 이는 통일 전쟁의 승자인 신라의 처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이 시각의 또 다른 하나는 신라사를 보는 범위에서, 신라의 국가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眞興王) 시대였으므로, 통일의 기반도 이 시기(540 - 576)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호영, 『삼국통일』『신편 한국사』9 p.16,1998]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통일 전쟁사의 시작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안을 차지한 진흥왕대의 팽창이 그 시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