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수혜자 (문단 편집) === [[관우]] === [[나관중]]을 비롯해 세대를 거듭하며 재창조된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덴티티이며, 넓게는 동양문화권 전체에서 의리와 무(武)의 화신[* 농담이 아니다. 이후 재물신 타이틀까지 얻으면서 삼관왕을 달성했다.]이라 불린다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다. [[항우]]와 함께 무의 아이콘으로 꼽히기도 한다. 기실 정식 역사서에 기록된 [[관우]]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진 [[관우]]의 캐릭터는 [[삼국지연의|연의]]에 의해 창작된 것들이 많다. 흔히 [[삼국지연의|연의]]의 [[관우]]하면 떠올리게 되는 굳센 충의와 고아한 인품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러한 이미지를 형성한 세세한 에피소드들은 [[나관중]]이 만들어낸 허구성이 짙다. [[관우]]의 의를 대표하는 장면들은 각색이 더해진 것.[* 애초에 [[촉한|촉]]의 1세대 장수들은 [[마초]]를 제외하면 남겨진 기록이 매우 적다.] 물론 관우는 연의가 만들어지던 시점에서도 이미 민간 설화에서는 상당한 인기인이었다. 다만 일단 관우의 명성 자체를 널리 퍼뜨린 건 연의가 주된 매체이고, 나관중이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건 분명한 사실이다. 즉 종합하자면 관우의 이미지를 나관중이 다 만들었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으나 그렇다고 기존에 있던 민간 이미지를 집대성 시킨 것 뿐이므로 '관우가 연의의 수혜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해당 항목에 있기는 하지만 '''실제 아래에 있는 모든 사항은 거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우며 연의 이전에도 있었던 시각임을 유의하자.''' 다음은 연의에서 관우의 인품과 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창작되었거나 삭제 혹은 변경된 장면들이다. * 정사에 따르면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당시 관우가 미인으로 알려진 [[진의록]]의 전처, [[두씨]]를 달라고 조조에게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가 두씨를 데려간다.] * 유비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형수님들을 잘 돌봐준 것은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유비의 처자가 조조에게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형수들의 행방이 나와있지 않아 관우가 유비에게 형수들을 데려갔는지조차 불분명하다. * 관우가 미래가 약속된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 돌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육참과 천리행 장면은 허구다. 특히 천리행은 지도상으로는 가까운 거리(당시의 기준으로는 아주 가깝다고 하기는 힘들겠지만)를 빙빙 돌아가게 만들었다. * [[적벽대전]] 직후, [[화용도]]에서 조조를 옛 정을 생각해서 놓아주는 장면은 허구다. * [[황충]]과의 [[일기토]] 도중 황충이 말에서 떨어지자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싶다면서 말을 갈아타고 오라고 요구하는데 이 장면도 허구다. 정사에서는 관우와 황충이 일기토를 했었다는 언급조차 없다. * 정사에 따르면 [[문빙]]과 [[악진]]이 관우를 심구에서 격퇴하였다고 하며, [[이통]]이 관우를 공격하여 포위당했던 조인을 구원하였다는 언급도 있지만 연의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 정사에 따르면 [[익양대치]] 중 [[감녕]]을 경계하여 강을 건너 공격을 하지못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연의에선 익양대치 자체가 누락되어 있다.] * 연의에선 [[형주]] 반환 문제로 인한 [[노숙]]과의 회담에서 영리하게 노숙을 인질 삼아 피신했다고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거진 침묵으로 일관했다. * 정사에 따르면 그의 부하였던 [[미방]], [[사인]], [[반준]]과 불화했다고 한다. 결국 이 셋 모두 [[손권]]의 밑으로 들어간다. * 연의에선 번성에서 수공을 사용하여 [[우금]]과 [[방덕]]을 사로잡고 칠군을 수몰시켰다고 하는데, 정사에선 단지 장마로 인한 홍수였다고 한다. 다만 정사 [[방덕]]전을 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관우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큰 비를 예견하고 대비는 한 것 같다. * 정사에 따르면 [[손권]]과 불화한 장면이 많다. 손권을 '오소리'라고 모욕했고, 이후 [[우금]]과 [[조조]]군 소속의 포로 3만여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상관 지역에 있던 손권의 군량고를 급습하기까지 했다. 다만, 손권이 관우에게 지원군을 먼저 보내겠다고 언질을 준 후, 고의로 지원군을 천천히 보내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손권 역시 어느 정도의 원인 제공은 했다. 관우 스스로 자신의 성질을 못 이긴게 문제. 그런데 손권과의 갈등은 오히려 연의쪽이 더 심각하게 묘사된다. 손권이 혼인 제의를 하자 관우는 "호랑이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며 거절하는데 이건 연의의 창작이다. * 연의에선 손권의 항복 제의를 거절하고 도망치다 사로잡혀 죽었다고 나오지만, 정사에 따르면 맥성에서 거짓으로 항복한 척하고 몰래 도망가다가 생포된 것이라고 한다. * 죽어서도 유령으로 계속 등장하여 기어코 원수를 갚고 만다는 연의에서의 묘사는 당연히 허구다. 다만 '''정사에서는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삼국시대 최강의 무장'''이나, 연의에서는 여포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고 묘사에 따라서는 장비 다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부분은 너프다. 다음은 정사와 연의에서 각각 묘사된 관우의 무예를 교차 검증한 것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는 장면은 창작이다. * 연의에서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일기토를 벌인다는 [[삼영전여포]] 대목이 있는데, 이 역시 여포를 무력 최강으로 만들기 위한 후대의 창작이다. * 연의에서 관우는 황건적 [[관해]]를 상대로 일기토를 벌여 수십합의 경합 끝에 승리하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 연의에서 관우는 [[기령]]을 상대로 한 일기토에서 30여 합이 넘어가면서부터 우세함을 보이나 이것도 창작이다. * 정사에서 관우는 [[장료]]와 함께 선봉에 서서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 [[안량]]을 참했다. 이후 원소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아무도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는 대목을 보면 관우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공을 지녔던 장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 연의에서 관우가 [[문추]]를 죽인 것은 허구다. * 연의에서 오관육참 후 관우와 [[하후돈]]이 경합으로 일기토를 겨루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오히려 연의를 통해 제대로 무예 버프를 받은 것은 하후돈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장사성을 공격했을 때 [[황충]]과 일기토를 벌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창작이다. * 연의에서 [[번성 공방전]]에서 [[방덕]], [[서황]]과의 일기토가 경합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에는 없는 창작 장면이다. * 정사에서 [[방덕]]이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우는 죽지 않았다.[* 많은 만화나 영상에서는 관우가 투구대신에 관을 쓰고 있는데 방덕이 그 관의 윗부분을 맞춰서 이마 근처를 맞추면서도 목숨자체는 위험하지는 않은 방식으로 영리하게 방덕의 무를 높였다.] 또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화살에 맞은 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피가 넘쳐 흐름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 했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강인함을 증명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연의에서 그려지는 관우의 일기토 싸움들 중 경합으로 묘사되는 장면들은 사실상 전부 허구이다. 여기에 [[삼국지 정사]]에서는 [[일기토]] 사례들이 전 장수들을 통틀어도 거의 한 손에 꼽을 정도였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관우의 개인 무력은 한 무력하는 웬만한 무장들은 일기토로 적장 1명쯤 처치하는식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널린 연의보다 오히려 정사에서 더 높게 평가 되어 진다. 행적과 성품의 묘사에선 연의의 최대 수혜를 받았지만, 정작 본업인 무예에서는 정사에도 안나오는 일기토 경합 장면들이 창작되어 연의에 등장하는 바람에 피해를 봤다는 점은 아이러니. 아울러 정사에서의 [[관우]]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유비]]군의 초창기 시절부터 적국의 모사들로부터 [[만인지적]]이란 소리를 공공연히 들었으며 범같이 용맹한 장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관도대전]]에서는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안량]]을 베어버렸고, 이때 원소군 장수들이 관우 한명을 당해내지 못하여 백마의 포위가 저절로 풀렸다고 정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또한, 번성 공략 당시 7군 수몰로 명성이 천하에 퍼져 잘 나갈 때는 그 [[조조]]조차도 관우를 피해 수도를 옮기려 할 정도였었다고 하니 확실히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은 용장이었다. 관우의 충의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원래 이름 높았던 관우의 충의에 더더욱 포장을 해놨기 때문에 연의에서 수혜를 입었다고 하는 것일뿐, 아예 충의가 없었던 장수인데 미화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연의의 오관참장은 허구이나, 실제로 당시 조조 진영에서의 약속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객장 노릇이나 하던 유비를 찾아간 건 실제 있었던 일이다. 즉, [[나관중]]은 후한의 이 의기높은 무인을 재해석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친 충의지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재창조된 그의 이미지는 [[중국인]]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으며, 중화를 대표하는 모범적인 캐릭터로서 피지배 계급과 이민족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결국 관우의 충의에 대한 사실을 정리해보자면, 평생 유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삼국시대 최고의 용장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후세에 의해 재창조가 덧씌워졌을지언정 [[관우]]의 의(義)나 무(武) 자체가 의심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또한 관우가 당대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후대에도 무신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물론 그의 무예가 대단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의지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실제로도 신의있고 무예가 출중한 무장이었으나, [[삼국지연의|연의]]에 의해 여기에 고고한 인품과 학식이 추가되고 무예가 조금 너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덧붙이면 관우는 학자급도 아니었지만, 자기 이름도 못쓰는 일자무식의 장수도 아니였다. 정사부터 관우는 [[춘추좌씨전]]을 즐겨 애독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그의 학식이 일개 무부수준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긴 하다. 추가하자면 관우는 '삼국지연의가 쓰여지기 전부터 상당한 인기인' 따위가 아니라 북송시절부터 국가적인 규모의 숭배를 받던 인물이다. 관우에 대한 신격화가 시작되기 전인 남북조 시절부터 '관장지용'으로 그는 용맹한 장수의 대명사로 쓰였으며, 그 이후 형주에선 지역신으로 숭배되다가 북송에 들어서 국가의 수호신 위치까지 격상된다. 송철종은 헌열왕으로 관우를 봉했으며, 관우는 이후에도 남송, 원나라를 이어 명나라 대에는 황제의 칭호까지 받으며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관우신앙은 이어진다. 단, 관우 때문에 캐릭터가 뒤틀린 인물들은 많다. [[관평]], [[주창]], [[관흥]] 등 그의 주변 인물들이 상당히 업그레이드 된 반면 그의 죽음에 관여했던 [[여몽]], [[반장(삼국지)|반장]], [[반준]], [[미방]] 등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화웅]]이나 [[안량]], [[문추]]는 상당히 애매하게 혜택을 받아서 적어도 [[관우]]에게 썰리기 전까진 신나게 썰고 다닌다. 즉, 관우와 반목하되 결국 관우에게 패배해서 죽으면 미화가 되고 되려 관우를 죽게하는 데 책임이 생기면 평가가 떨어지고 관우를 잘 우대한 사람도 좋게 평가받는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추가하자면 관우를 죽이는데 직접 관여한 오나라 장수는 정말 어이없이 죽음을 당하거나 무능하게 나온다. 오나라의 대도독까지 역임했던 [[주연(삼국지)|주연]]은 수명이 무려 20년이나 줄어들어 죽었으며, [[여몽]]은 몸의 전 구멍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는 호러스러운 죽음을 겪었고, 반장, [[이이(삼국지)|이이]], [[사정(삼국지)|사정]] 등은 참 황당하게 죽임을 당했다. 위나라 장수도 딱히 나은 편은 아닌데, 번성공방전에서 관우의 포위를 깨부신 위나라 최고 명장 중 하나인 [[서황]]은 [[안량]]에게 일기토에 패하고, [[왕평]]을 핍박하는 소인배에 죽음마저도 [[맹달]]이 아무렇게나 쏜 화살에 맞아죽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관우를 상대로 번성을 사수해낸 [[조인]] 역시 연의에서는 여기저기 털리는 호구로 나온다. [[만총]]은 그에 비하면 너프는 아니지만 뛰어난 지휘관이자 도독으로써의 모습이 거의 삭제되고 그저 외교전담 셔틀정도로만 등장한다. 사실 관우가 일방적인 수혜자라고 보기엔 좀 애매한 부분도 있다. 역사상의 관우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오만했으나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한 인물이었는데, 이 점이 연의에선 생략되었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힘들게 되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형주공방전 당시 소설의 특성상 당시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관우와 손권의 자존심 싸움으로 단순화한 감이 있다. 관우가 손권과 반목한 것도 단순히 둘이 서로 싫어해서가 아니라 번성공방전 당시 손권과 유비는 위태위태하던 동맹이 결국 파탄이 나는 과정이었기에 직설적이고 솔직한 관우가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당시 손권이 관우에게 서신을 보내서 '급하게 나아가지 말라'고 했을 시기는 정확히 기록은 되어있진 않지만 서황이 전선에 투입된 8월 이후였고, 손권은 이로부터 두달 뒤인 10월달에 조조에게 칭번하면서 관우를 치겠다고 한다. 그리고 한달 뒤인 11월에 여몽과 육손이 공안과 남군을 점령한다.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해놓고 지지부진하며 몇달간 안 보내고, 기껏 사신을 보내서 한다는 말이 '급하게 가지 마시오'였던 사람이 불과 두달 후에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를 습격하기로 약속하고, 곧바로 관우의 배후를 친 것이다. 심지어 조조와 밀약을 맺은지 한달도 안되어 파견도 아니고 점령까지 해버린 것이다. 이건 손권이 미리 해당 지역에 관우 몰래 군대를 보내놨기 때문이다. 애초에 관우를 도울 생각이었으면 번 쪽으로 군대를 보냈지 이 지역으로 군대를 옮겨놓을 이유가 없다. 이를 두고 배송지는 "이미 형주와 양주는 서로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습니다. 여몽전(呂蒙傳)을 살피면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범인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만들게 했다고 이르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관우는 손권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도 필시 관우에게 마땅히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의 거동을 숨겼겠습니까?"라고 '손권이 관우를 도우려 했다'는 기록에 의문을 표했다. 실제로 손권은 유비가 입촉하던 시기에 시집보냈던 손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게 했다는데, 이 점을 보면 배송지의 기록대로 둘의 동맹이 이미 끝났다는게 더욱 명백하다. 즉 손권은 이미 군대를 관우의 후방으로 보내고, 동생은 미리 빼놓는 등 밑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 관우와 혼인동맹을 맺으려는 이유는 뻔하다. 당시 혼담이 오간 것은 관우의 '''딸'''과 손권의 아들이다. 당시는 시집가면 남편의 집에서 살기 때문에 관우의 딸을 오에 보내놓으란 것이다.[* 손권이 이전에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 것도 '내 동생이 그쪽에 있으니 난 당신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정치적 제스쳐이다. 사실 당시 혼인동맹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손권 본인은 손부인을 오로 돌아오게 해 인질을 빼놓고, 관우의 딸은 자기한테 보내라는 건 의도가 명확하다.] 또한 관우의 군세에 조조가 위협을 느껴 천도하려 했을 당시 사마의와 장제가 이에 반대하면서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고 하면서 반대하기도 했다. 즉 관우가 분노조절장애라 우군한테 욕을 하면서 트롤링을 해 동맹을 한게 아니라, 동맹관계가 사실상 파탄이 났는데 손권은 몰래 관우의 후방으론 군대를 파견하면서 정작 지원군은 안 보내고 서신으로는 "(번으로) 급하게 나아가지 말라"고 애매한 짓을 하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을 생략하고 (실제 역사에 없는) "호랑이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는 대사를 넣으니 현대 독자들이 보기엔 이상하게 된 것이다. 염두에 둬야할 것은 나관중 본인도 명나라 대 인물로, 현대 독자들과는 수백년 차이가 나는 옛날 사람이란 것 때문에, 미화하려고 한 묘사가 현대에 와서 보기엔 약간 이상해진 면도 있다. 나관중은 유비를 주인공으로, 당시 관왕으로 명성이 높던 관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으나, 당시 잣대로 미화했기에 후대에 보기엔 오히려 이상해진 것. 대표적인 것이 유비의 뛰어난 능력을 생략하고 마치 그가 인덕만 있는 인물처럼 묘사한 것이다. 나관중 입장에선 촉한 측 인물들을 최대한 미화하려고 한 의도가 분명하나 명나라 당대 소설가의 시선으로 했기에 앞뒤가 안 맞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 부분은 실존인물의 행적과 비교해본다면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