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지명/형주 (문단 편집) == 개요 ==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예주 이남의 남부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형주|형주(荊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형주자사부가 되었다. 사실 형주는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형만(荊蠻)으로 멸칭하면서 발생한 이름이다. 현재의 [[후난성]]과 [[후베이성]] 전역 및 [[허난성]]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youtube(zhCI5Bw3aOE)] 후한 때 형주자사의 치소는 무릉군 한수현에 있었는데, 190년에 [[유표]]가 형주자사가 되었을 당시 부임할 수 없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형주 상황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으로, 189년에 장사태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s-2|왕예]]를 살해했고, [[원술]]은 손견을 사주해 남양태수 [[장자(삼국지)|장자]]를 죽여 남양군을 점거하였으며, 호족들의 사병들을 가리키는 '종적(宗賊)'들이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결국 유표는 초나라 때 북진수(北津戍)로 불리던 곳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여 남군 양양현을 이전해 오고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채모]]나 [[괴월]] 같은 양양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 형주 각지에서 할거하던 호족들을 살해하여 각 군·현을 장악하고, [[18로 제후|반동탁 연합군]]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 원술을 인정했다. 이후 원술이 [[원소(삼국지)|원소]]와 대립하자 유표는 원소에게 협력했는데, 이에 원술이 손견을 보내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손견을 기습하여 전사시켰다. 193년 무렵에 형주목으로 승격하고 원술도 남양군에서 완전히 쫓아내어, 명실상부한 형주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형주 안에서는 황제와 같은 행세를 했다. 유표는 삼보(三輔)에서 밀려난 [[장제(후한 군벌)|장제]]–[[장수(삼국지)|장수]] 세력을 남양군 일대에 배치해 [[조조]]의 남하에 대비하였으나, 동쪽으로는 손견의 아들인 [[손책]]이 양주(揚州) 강동 일대를 장악하면서 손견의 복수를 명목으로 유표와 적대했고, 남쪽으로는 장사태수 [[장선(장사태수)|장선]]이 영릉군·계양군까지 끌어들여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기에, 형주 이외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군을 제압한 뒤에는 교주목 [[장진(삼국지)#s-2|장진]]이 죽은 틈을 타서 [[뇌공#s-1|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교주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자신이 임명한 창오태수 [[오거(후한)|오거]]가 독립하여 실패했다. 유표는 오거에게 교주로의 진출을 저지당한 뒤로는 세력 확장을 시도하지 못했다. [[관도대전]] 이후부터 기존에 유표를 지원해오던 양양 호족들은 형주에서의 할거를 중단하고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유표에게 요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표는 조조와 적대하는 [[유비]]를 받아들여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시킴으로 조조와의 대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이들의 반발을 억누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208년에 [[손권]]이 강하태수 [[황조(삼국지)|황조]]를 살해하고 강하군·장사군·남군의 동부지역을 점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해 유표가 죽자, [[유종(삼국지)|유종]]이 채모 등의 추대를 받아 형주자사를 승계하면서 곧바로 조조에게 투항했고,[* [[왕찬]]에 따르면 유표가 죽기 전에 유비를 후임 형주목으로 추대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당사자인 유비는 평생 알지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유표의 세력이 유비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양양 호족들이 유종을 추대해 황급히 조조에 투항해버린 원인이 된 것 같다.] 이를 기회로 여긴 조조는 곧바로 형주로 남하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적벽대전]]으로 [[조조]]의 남하는 저지되었고,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그대로 남군을 공격하여 209년에 남군을 지키던 [[조인]]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남군을 점령하자 손권은 멋대로 [[주유(삼국지)|주유]]를 남군태수에 임명했다. 이때 유비는 유표의 장남인 [[유기(삼국지)|유기]]를 유표의 후계자로 추대하고, 공안에 새로운 형주목의 치소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유기가 죽자 유기의 후계자로써 형주목을 자칭했으며, 형주 현지에서도 유비에 호응했는지 유비는 순식간에 형주 남부의 4군을 장악하였다. 형주를 차지하려던 손권과 주유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세력은 충돌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때 유비가 직접 단도현의 경성으로 손권을 직접 찾아가 손권을 거기장군 겸 서주목으로 추대하고, 손권은 자기 [[손부인|여동생]]을 유비와 혼인시켜 유비를 감시하게 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이 시점에 유비가 스스로 '형주대여론'을 손권에게 직접 제시하면서, 손권에게서 형주 지역의 태수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주유와 [[황개]] 등의 퇴거를 요구하고, 토로장군에 불과하여 부하들을 장군으로 임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손권에게 거기장군 추대를 제안하는 정치적 이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 손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주유가 완강하게 이를 반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유가 죽자 강하태수 [[정보(삼국지)|정보]]가 남군태수 직을 이었는데, 그 직후에 손권이 결국 유비의 '형주대여론'을 수용했는지, 결국 정보를 다시 강하태수로 임명한 것이 확인된다. 210년을 기준으로 형주 분할 상황을 정리하면, 조조가 남양군·남향군·장릉군·양양군을, 유비가 남군·의도군·장사군·계양군·무릉군·영릉군과 강하군 일부를 차지했으며, 손권이 황조를 죽이고 차지했던 지역은 손권의 영역으로 남았다. 손권이 차지한 장사군·남군 지역에는 한창군이 설치되어 [[노숙(삼국지)|노숙]]이 주둔했으며, 강하군에는 정보가 주둔했다. 강하군은 대체로 동·서로 유비와 손권이 양분한 가운데, 황조가 죽은 시점에 장강 이북의 강하군 동북부는 조조에게 투항하여 양주 기춘군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손권은 교주로 관심을 돌려 211년에 오거를 멸망시켜 교주를 장악했고, 오거와 교분이 있었던 유비는 이를 묵인했다. 214년에 손권은 합비에서 패전하여 예주와 서주 방면으로의 진출이 저지당하자, 당시 익주를 차지한 유비에게 '형주대여론'을 명분으로 형주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고, 유비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손권이 실력을 행사해 유비의 영역을 침공하여, 장사군 익양에서 대치했다. 그 와중에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는 더 이상의 대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손권과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두 세력은 215년에 유비가 남군·무릉군·영릉군·의도군을 손권이 장사군·계양군·강하군·한창군을 갖는 것으로 형주 분할에 합의했다. 그러나 손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219년에 [[관우]]가 북상하여 번성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 [[여몽]]을 보내 유비의 형주 4군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유비는 이에 즉시 대응하지 못하다가 221년에 황제에 오른 뒤에 곧바로 손권에게 보복을 개시했으나, [[이릉대전]]에서 참패를 겪어 형주 수복에 실패했다. 이로써 형주는 적벽대전 이후 3분할 되었다가,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와 오나라가 양분하여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223년 무렵 위나라의 강하태수 [[문빙]]이 강하군 서북부를 점령하여 강하군이 다시 분할되었다. 260년을 기준으로 위나라는 남양군·남향군·양양군·강하군과 원래 익주 소속이던 위흥군·상용군·신성군을 관할했으며, 오나라는 남군·의도군·건평군·강하군·무릉군·장사군·형양군·상동군·영릉군·계양군·임하군을 관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