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지명/익주 (문단 편집) === 남중(南中) 지방 === 익주 남부지방의 익주군·월수군·영창군·장가군 등 4개 군은 당시에 '남중'이라는 지방 명칭으로 불렸는데, 후한 때부터 이 지방에는 '8성(姓)'으로 통칭되는 대호족들이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214년에 익주를 얻은 [[유비]]는 이 남중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건위속국도위부를 주제군으로 승격시키고, [[등방]]을 주제태수로 삼으면서 안원장군과 내항도독(庲降都督)직을 겸임시켰는데, 남중 4군에 대한 방비를 맡긴 것이었다. 등방이 죽은 뒤인 221년에는 [[이회(삼국지)|이회]]를 내항도독의 후임으로 임명하면서 교주자사를 겸임시켰다.[* 이 자사직은 태수가 아닌 이회에게 자사의 감군(監軍) 권한을 마련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 남중을 교주로 분할한 조치는 아니다.] 유비가 죽자, 남중 호족 중 하나였던 [[옹개]]가 교지군의 [[사섭]]을 통해 [[손권]]의 후원을 받아, 손권에게 영창태수직을 임명받고는 남중 호족들을 선동하여 촉한에 반기를 들었다. 정작 영창군에서는 [[여개]]와 [[왕항]]이 옹개의 진입을 막아냈으나, 장가태수 [[주포(삼국지)|주포]]가 반란에 합류했고, 익주군의 호족 [[맹획]] 등도 이에 동참했다. 월수군에서는 [[수족#s-2|수족]]왕 [[고정(삼국지)|고정]]이 옹개에 협력했다. 225년에 [[제갈량]]이 직접 이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했는데, 결국 내분이 일어나 옹개와 주포가 죽고, 고정 또한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이때 맹획은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기며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반란이 평정되자, 제갈량은 이때 군공을 세워 활약한 병사들만 성도로 데리고 돌아가고, 그렇지 못한 병사들은 남중의 호족들에게 배분했는데,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내항도독의 직할부대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내항도독이 남중 호족들을 직접 통솔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남중 4군을 재편해 건녕군·운남군·월수군·영창군·장가군·흥고군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주제군을 더해 남중 7군이 되어 이를 내항도독의 관할 구역으로 삼았다. 229년에 촉한이 오나라와 천하를 분할하는 맹약을 맺었는데, 이때 교주가 오나라의 영역으로 인정되면서 교주자사직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회는 건녕태수로 임명되었는데 내항도독은 그대로 겸임하였고, 이후 이회의 후임자들도 건녕태수와 내항도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촉한이 멸망한 뒤에는 내항도독을 남중도독(南中都督)으로 고쳤다. 이후 서진 때인 271년에 남중 지방에 영주(寧州)가 설치되었는데, 건녕군·운남군·영창군·흥고군 4군만이 소속되었다. 282년에 영주를 폐지하여 익주에 합병했는데, 303년에 남중 7군을 분할해 다시 영주를 설치했다. 혹자는 내항도독이 관할하는 내항도독부(庲降都督部)가 남중 지방의 이민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특별자치구역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화양국지|『화양국지』]]에 기록된 내항도독과 내항도독의 예하로 편성된 호족들의 역할과 상충하는 것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망상일 뿐이다. 내항도독은 어디까지나 군사분야에서 작전통제권을 갖는 관직이었을 뿐, 이를 통해 건녕태수가 행정영역에서 다른 6군 태수를 지휘하거나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내항도독이 남중 지방의 정치에서 특별했던 것은 225년 이후 남중 호족들이 내항도독의 예하부대장으로 편성되면서 내항도독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된 것에 있었다. 『화양국지』에서는 내항도독이 설치됨으로 인해 이민족들이 특별한 자치를 누렸다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남중 호족들이 직접 이민족을 관리하게 만들어 그들의 직할부대로 편성하게 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이다. 특히 후한은 이민족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중원 내지에 산재한 이민족들조차 군·현에 직접 예속시키기보다는 그저 이민족 작위를 책봉하여 조세와 징집의 의무만을 부과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내항도독부의 설치로 남중의 이민족들이 특별한 자치를 누리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삼국지연의|『삼국지연의』]]에서는 남중 지방이 남만족들이 우글거리는 두메산골의 별천지처럼 묘사했는데, 역사적으로 익주 지방의 이민족들은 '남만'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남이'라고 통칭했으며, 남중지방은 [[무제(전한)|한무제]] 이후로 줄곧 군·현이 운영되어 왔기에 각색이 과한 것이다. 특히 남중 호족인 맹획이 남만왕(...)으로 둔갑하여 남중 반란의 주모자인 것처럼 묘사했으나, 실제 반란의 주모자는 옹개였고 그 주모자들이 내분을 일으켜 모두 죽으면서 맹획이 반란군을 이끄는 입장이 되어버렸던 것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