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관직 (문단 편집) === 문관 === * 내조(內朝): 일종의 황제의 비서직으로, 이 내조의 업무는 상서와 시중으로 나뉘어 처리하였다. * [[상서]](尙書): 상서성(尙書省)의 천자와 조신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맡아보던 관직. 상서령(尙書令) 밑에서 정무를 분장하였다. 원래 일종의 비서관격이던 것이, 후한 때부터 점점 중요한 지위로 되어 육조로 갈리어 각각 직무를 달리하였다. 전한에는 정원이 4명이었다가 후한 [[광무제]]가 이천석조를 둘로 나누고 객조를 남북으로 나누어 6조가 되었다. 나중에는 이 벼슬이 차차 높아져서 [[당나라]]와 [[송나라]] 때는 중앙 정부의 수위(首位)에 앉아 6부(部)의 장관이 되었다가 뒤에는 중앙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상서는 대신으로 아름이 바뀌었다. * 상서령: 상서성을 총괄하는 대신이며, 한헌제 때에는 [[순욱]]의 직책이었다. 한대 이후로 사실상 명예직으로만 남은 삼공과 달리, 실무를 관장하는 상서령의 위치는 점점 중요해졌으며, [[촉한]]에서는 대장군에 대비되는 문관의 수장이었다. 남북조 이후로는 사실상 권한이 재상에 이르렀으나 [[당고조]] 때에 [[이세민]]이 역임하였다고 태종 즉위 이후 폐지되고, 좌우복야가 상서령의 집무를 분담하게 된다. * 복야(僕射): 관청의 주인, 또는 장의 직위. 진나라 때 시작되어 한나라로 계승되어 군인, 궁인(宮人)상서(尙書), 박사(博士) 등에 모두 복야가 있었으나, 그 후 상서복야 외에는 모두 폐지되고 이것만이 전문직이 되었다. 6등관. 왕윤과 공모해 동탁을 제거한 [[사손서]]가 상서복야였다. * 상시조(常侍曹): 공경(公卿)들의 사무를 주관. * 이천석조(二千石曹): 군국(郡國)의 이천석(二千石,태수와 상相)에 관련된 사무를 주관. * 민조(民曹): 모든 관리들이 상서(上書)하는 사무를 주관. * 객조(客曹): 외국(外國)의 이적(夷狄, 오랑캐)들에 관련된 사무를 주관. * 승(丞): 각 조에 좌승과 우승이 1명씩 있었다. 상서좌승(尙書左丞)은 관리와 백성들의 장보(章報, 상주) 및 추백사(騶伯史)를 주관한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은 관리들에게 인수(印綬)를 내리며 서임하는 것 및 지필묵(紙筆墨) 등의 여러 재용(財用, 재물) 고장(庫藏, 창고에 저장된 물품)을 주관한다. 품질은 사백 석이다. * [[시랑(관직)|시랑]](侍郞): 36명이고 관질은 4백 석이다. 조(曹) 하나마다 6명씩 있고 문서의 기초(起草, 초안)를 짓는 것을 주관한다. * 령사(令史): 18명이고 관질은 2백 석이다. 조(曹)마다 3명씩 있고 글쓰는 것(書)을 주관한다. 뒤에 극조(劇曹, 업무가 많고 바쁜 조曹)에 3명을 늘려 도합 21명이 되었다. * [[시중]](侍中): 소부의 아래 관직이다. 항상 천자를 수행하면서 고문에 응하고, 거동시는 가교 뒤를 기마로 따른다. 녹봉 2천 석. 천자를 시중하고 어가(御駕)와 어의(御衣) 등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때 설치된 것인데 위진(魏晉) 이후에는 문하성(門下省)의 대신을 시중이라 칭했다. * [[사예교위]](司隸校尉): 치안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한나라 때는 13개 주 가운데 낙양이 있는 한 주만은 특별히 자사(刺史)를 두지 않고 사예교위를 두었다. 따라서, 수도와 그 주변의 모든 범죄자를 검거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삼공을 제외한 모든 대신과 맞먹었다. 또한, 지방 관청에 대한 감독권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어떤 부서에도 속하지 않고 황제로부터 직접 임무를 부여받아 결과를 황제께 직접 하였다.(감찰감독) 원소는 이 직책을 바탕으로 하북에서도 실권을 쥐었다. * 하남윤(河南尹): 서울시장 격. 하남은 [[낙양]]이 속한 군으로, 전한 때에는 일반 군이었으나 후한 때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하남윤으로 격상되었다. 녹봉 중 2천 석. 하후돈이 초창기 이 직위를 맡았다.[* 후한의 장수 [[주준]]도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거기장군 겸 하남윤으로 임명되었다. 오늘로 보면 현역 장성인 사단장, 군단장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어 민정업무까지 도맡는 격이다.] * 중부연리(中部椽吏): 하남윤의 속관으로 각 현을 순회하는 감독관인 독우는 각 군마다 모두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부로 갈라 관할을 달리하였던 것 같다. * 주부(主簿): 공부(三公府)에서 군(郡)에 이르기까지 각 관청에 두었던 문서나 기록을 담당했던 관리. 대장군(大將軍)의 막하(幕下)에는 황각주부(黃閣主簿), 사예교위(司隷校尉) 밑에는 주부가 있었다. 한중공방전 당시 양수가 맡은 자리. 의외로 여포도 정사에서는 정원 휘하에서 주부를 지냈다. *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는 원래 천자가 비장하는 서적이라는 뜻이다. 비서 낭중도 같은 같은 관직이었으며, 명문 자제로써 임용하였는데, 보통 관리의 첫 출발은 비서랑으로 들어가는 것이 통례였다. * 중서령(中書令): 궁중의 문서를 맡아보던 중서성(中書省)의 직책. 한나라 무제 때부터는 일반 사람으로 쓰게 되었다. [[조비|위 문제]] 때부터는 비서성을 중서성으로 고쳐 상서성을 점점 대신하였으며 중서성의 장관으로 추밀에 관해서도 다루게 했다. 비서랑과 비슷하다. 상서성은 전국 민정을 총괄하는 정책의 실행기관, 중서성은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라 한-위-진 교체기 황제의 성씨 따위가 아닌 체제 그 자체의 변화와, 그것이 가지는 역사 발전 단계에서의 의미/방향성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중서의 변혁사라고 볼 수 있다. 중서는 본래 내조(內朝)에 속하는 기구로 상서와 함께 황제와 외조(外朝) 사이의 문서 출납을 관리했으나,광무제 이후 상서가 외조로 분리되어 좀 더 실질적인 업무를 맡게 됨으로써 중서는 내/외조의 연결을 독점하는 중핵이 되었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후한 말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환관의 전횡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 중서를 포함한 내조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한나라 때 중서는 사실 그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이런저런 환관 내조 기관의 일부에 불과했던 게, 위나라 때 내조가 본래의 폐쇄성(즉,사인 계급에 대한 배타성)을 상실하며 외조와 구분이 유명무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 내조 기관에 가까운 폐쇄성을 유지한 '최후의 내조'로 남은 것이 이 시기 중서의 위치를 독보적으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그런 체제의 타파를 추구한다는 공통의 목표하에 조씨와 호족 세력이 손을 잡음으로써 성립된 조위는 '탁류'로 변질된 내조 권력의 원류 - 즉 환관과 외척을 정치 무대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사실상의 국시로 삼고, 그들의 전유물이었던 내조 관직을 사인(=호족)에게 전면 개방하였는데 조예 사후, '삼소제'의 시대에 이르러 황제권의 약화와 동시에 중서는 그 존재감을 크게 상실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마씨에 저항한 최초의 항거가 중서령이었던 이풍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특기해 볼 만하다.] 이후 결국 사마씨가 조씨로부터 옥좌를 찬탈해 세워진 진나라에서 중서의 자리는 주류 대호족 세력에게 넘어가고 만다. 일단 서진의 초대 중서감이 그런 대호족 세력의 간판과도 같은 순씨 가문의 순욱이었고, 그 이후에도 (장화를 제외하면) 그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은 화흠의 손자 화이, 노식의 현손 노심 등 쟁쟁한 호족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 즉 정리해 보자면 환관의 전유물이었던 한대의 중서가 황제(조씨)의 측근/수족의 역할에 철저했던 위대의 중서를 거쳐 마침내 주류 대호족 계층이 진출,장악한 서진의 중서로 완성된 셈인데 이러한 중서의 변화는 결국 한말 당고의 금 이래 호족 사대부 계층 전체의 비원 - 즉 자신들이 가진 향촌 지배력에 걸맞은 중앙 정부 내에서의 발언권과 입지 확보라는 과제가, 조씨와의 팽팽한 연립 정권이었던 위나라를 거쳐, 끝내 자신들의 계층에서 황제를 배출해 내고 만 진대에 이르러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그 전개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보인다. * 태자사인(太子舍人): 태자를 가까이 모시는 시관. 후한에서는 태자 소부에 속하여 궁중의 숙위에 임하였다. 양가의 자제 중에서 선발 임용하였다. [[조모]]를 시해한 [[성쉬]], [[성제]]가 태자사인이었다. * 태중대부(太中大夫): 궁중의 의론(議論)을 맡아보던 관직. 진(晉)나라 때 비롯되었으나 수나라 이후부터 단순한 산관(散官)이 되고 말았다. * [[환관]](宦官): 거세(去勢)된 남자~~고자~~로서 궁중에서 벼슬을 하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역되던 자로 시인(寺人)·엄관(官:奄人)·정신(淨身)·내수(內竪)·중관(中官)·혼시(寺)·환시(宦寺)·환자(宦者)·황문(黃門) 등의 이름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별칭으로 내시(內侍)라 하였고, [[영어]]에서는 [[그리스어]]에서 연유하였다는 ‘eunuch’가 해당된다. * 중상시(中常侍): 상시(常侍)라 불리기도 한다. 궁중의 일을 관장하는 황제의 사부(私府)인 소부(少府)에 속해있는 관리다. [[환관]]직종 중 최고위직이다. 시종장(侍從長)과 비슷하다. [[십상시]](十常侍)는 10명의 상시를 말한다. * 황문상시(黃門常侍): 원래 황문이란 궁문(宮門) 또는 궁서(宮署)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급사황문시랑, 황문시랑, 황문랑, 소황문, 중황문, 황문감 등으로 분할된 벼슬이 되었다. 주로 환관이 맡아 환관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으나 황문시랑 같은 경우 환관이 아닌 사람도 맡은 일이 많아서 마냥 그렇게 보기도 곤란해졌다. 삼국지연의에는 황완의 아들 [[황규]]가 맡은 직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