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서술상 특징 == [[기전체]]사서이다. 사건이 여러 인물의 전에 흩어져 있어 큰 사건은 한 인물의 전기만 읽어서는 사건의 전체상을 잘못 파악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제기만 읽으면 [[적벽대전]]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주전>, <주유전> 등에 의하면 적벽대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조조가 대패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른 인물의 열전에 다른 사건이 기록돼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면 기, 전을 앞뒤로 열심히 뒤져봐야 한다. 또한 '표'와 '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은 《[[후한서]]》나 《[[진서]](晉書)》를 참조하여 보충해야 한다. 삼국지의 도입을 삼국이 정립한 순간이 아닌, 황건적이 봉기한 이후부터 서술하였다. 이는 사서의 시대구분에도 기념비적인 것이다.황건적의 봉기를 진압한 군벌들이 각축장을 벌인 후 정립된 것이 삼국인 만큼, 명목상으로는 후한대인 황건봉기도 서술해야 그 서술이 자연스럽다. 이는 진수가 유교적으로 사고하였다면 절대 불가한 서술방식이며, 그가 삼국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황룡이 초(譙) 지방에 나타났다. >---- >『삼국지』「위서, 문제기」 천인감응과 참위를 신봉한 진수는 일식, 지진, 별의 출현과 소멸, 황룡이나 청룡의 등장, 봉황의 도래 등 신비한 사건을 다수 삽입하였다. 황룡이 초 지방[* 초현은 조조의 근거지이다.]에 나타나는 것은 두 차례이다. 한 번은 [[조비]]가 태어나기 전, 초현에서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고 두 번째는 조비가 위왕이 되면서이다. 이는 진수가 자연현상을 인간사와 연결지으려고 했음을 드러낸다. 조위가 후한을 대신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이는 과거에 이미 징조가 있었다고 서술한 것이다. 또한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할 때에도 "하늘의 봉록은 영원하며 그 운세가 진에 있다."고 서술하며 선양을 '천명'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물론 진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진수는 천명은 귀속하는 곳이 존재하며,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분수대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사마씨가 이미 황제가 되었으니 모두 그 통치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마씨 정권이 진수의 삼국지를 인가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 "천명은 귀속하는 곳이 있으며 지적인 능력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진수의 사상은 삼국지를 관통하는 거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마소]]가 군주시해의 우두머리였는데도 『위지』에는 "[[고귀향공]]이 죽었는데 스무 살이었다."라고만 서술하여 시해의 흔적을 전혀 보이지 않고...열전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더욱 곡필이 심한 바로다! >---- > 조익,『입이사차기』 진수는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조위, 사마씨의 악덕이나 흠결을 의도적으로 누락, 축소시켜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사마의가 제갈량이 죽었음에도 추격하지 못한 사실 등이 은폐되어 있다. 진수의 삼국지는 사실상 당대사이며, 따라서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건은 진왕조의 현재 정치와도 대단히 밀접했을 것이다. 또한 진수는 촉 출신이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마씨 아래에서 글을 써야 했던 진수의 사정은 감안해야겠으나, 삼국지의 생명력을 손상시켰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삼국지』가 비록 감싸는 바가 많다고 하지만, 평가나 판단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구애받지 않는 바가 있어 다른 책과 비교해보면 그 신중함을 알 수 있다. >---- > 조익,입이사차기』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때 그 사료의 선택이나 인물 평가가 공정하고 진지하였다. [[손책]]이 도사 우길을 죽여 그 영향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수신기의 기록과 같은 허무맹랑한 서술은 대부분 배제하였다. 이를 통해 사료를 선택할 때 아무 사료나 마구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략과 같은 사료에서 제갈량이 유비를 먼저 찾아갔다는 등의 서술보다는 [[삼고초려]]의 고사를 인용했는데, 삼고초려는 제갈량 자신의 소회인 만큼 그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다. 진수열전에 의하면 진수의 아버지는 마속의 부하로 마속이 처벌받자 그에 연좌되었으며 [[제갈첨]] 또한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수는 제갈량을 비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갈량을 관중과 소하에 비견하고 있으며, 마음의 씀씀이가 공평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칭찬한다. 또한 맹목적인 비방이 아니라 실사구시적으로 그의 단점을 지적하니, 공평하고 진지한 평론이라고 여겨졌다. 이 공정한 판단과 세심한 사료 선택으로 인해 삼국지는 고평가되었다. [* 물론 배송지의 주가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유려하고 간결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예를 들면 헌제기 주에는 조비가 선양을 받는 과정에서 조비가 여러 번을 사양했다고 하는데, 삼국지에는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선양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너무 간결하여 부족한 것을 후대의 배송지가 보주하여 진정한 삼국지가 탄생하였다. 또 오서의 경우에는 오나라에 대해 편파적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지림>에 따르면 <지림>의 저자 우희가 박물군자 유성숙에게 정사 삼국지에 오나라의 초대 승상인 [[손소]]전이 없는 까닭을 묻자 '<오서>의 편찬자 [[위소]]가 손소와 사이가 나쁜 [[장온]]의 당이기 때문이오'라고 답했다. 위소가 편찬한 <오서>는 오나라의 공식 관찬 사서로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때 그대로 인용했기에 손소의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즉, 진수가 그대로 인용한 <오서>는 오나라의 관찬 사서로서 오나라의 입장만을 중점적으로 반영했으므로 당연히 오나라에 기록이 편파적이거나 왜곡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세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서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학자가 청나라 시대 유명한 고증학자 조익이다.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의 군벌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기록이 간략한 편이고, 심하게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후한서는 군벌에 대해 삼국지보다는 우호적인 논조로 편찬되어 있어 같이 참고해서 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후반부의 [[사마의]], [[양호]], [[가충]], [[나헌]] 등 사마씨나 [[서진]]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은 이 책에도 언급이 되긴 하지만 삼국지보다는 [[진서]]에 더 자세하게 수록돼 있으므로 삼국지 중후반부에 관심이 있다면 진서까지 참고하는 것이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