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편찬과정, 시기 == 태강 초(서력 280-289년), [[진수(역사가)|진수]]는 《한명신주사(漢名臣奏事)》 30권, 《위명신주사(魏名臣奏事)》 40권, 목록 1권을 찬집했다. 진수가 찬집한 위의 두 책은 《[[수서]]》 경적지, 《[[구당서]]》 경적지, 《[[신당서]]》 예문지와 세선당서목(世善堂書目)에 산견된다. 이 2종의 책은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당시 수집하여 지은 사료이다. 《[[화양국지]]》 (진수의) 본전에는 "오나라가 평정된 이후 진수는 이에 삼국사를 구합하여 만들었으니 위, 오, 촉 65편으로 삼국지라 불렀다" 서술하였다. 진수가 삼국지를 지은 것은 《화양국지》 (진수의) 본전(本傳), [[왕은]](王隱)의 《진서(晉書, 청나라 탕구(湯球)의 집본)》 권7, 《진제공별전(晉諸公別傳,청나라 탕구의 집본)》과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본전에 보인다. 찬술에 착수한 시간은 대략 태강 초기였다. 앞에서 인용한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예지 중권에는 태강 년간에 진수가 저작랑이 되었다 하였다. 태강 원년, 손오가 가장 나중에 서진에게 멸망하고 천하가 다시 통일 되매 각 방면의 도적(圖籍)과 각종 중요한 당안(檔案) 자료들이 수도 낙양에 모이게 되었으니 삼국지와 같은 대형 사서를 찬술 할 수 있는 기초가 구비되었다.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지가 완성된 순서에 있어 <촉서>가 제일 처음이고 그 다음이 <위서>이며 또 그 다음이 <오서>였다 인식하고 있다. 이제 삼국지를 살펴보면 촉서 극정전에 극정이 죽은 해가 함녕 4년(서력 278년)이라 하였으므로 《삼국지》를 찬술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 해보다 빠를 수 없다. 그리고 함녕 4년에서 태강 원년 사이는 겨우 1년이 차이 날 따름이다. 또한 <위서> [[호질]]전에 [[호위(서진)|호위]]는 "안정(安定)에서 졸(卒) 하였다"하였는데 배송지의 주석에 인용된 《진양추(晉陽秋)》에 근거하면 호위는 태강 원년에 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나라 때 수찬된 《진서》 호위전에도 보인다) 《화양국지》, 왕은의 《진서(晉書-청나라 탕구의 집본)》와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의 본전에 근거하면 진수의 삼국지가 완성된 후, 권신이었던 [[순욱(서진)|순욱]]의 불만을 야기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무제기를 살펴보면 순욱은 태강 10년 11월에 졸하였으니 삼국지의 완성시점은 태강 10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하후담]]전과 진제공별전(청나라 탕구의 집본)에는 모두 진수의 책이 완성된 이후에 자신이 찬수한 《위서(魏書)》가 진수가 지은 것만 못한 것이 부끄러워 (자신의 책을) 훼손하여 없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후담이 죽은 것을 살펴보면 원강 초년이었으니 삼국지는 태강 연간에 완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