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저자 [[진수(역사가)|진수]]에 관한 문제 === [[진수(역사가)|진수]]와 관련된 오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s-1|진식]]인데,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해서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식은 진수의 아버지가 아니다. 진식은 229년 3차 북벌에 종군한 걸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기록이 없고 진식이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은 연의에서만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진수의 아버지는 1차 북벌 당시 마속의 부장이었는데, 패배의 책임으로 머리카락을 깎이는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2사차기(二十二史劄記)》(1795년)를 지은 청나라 [[고증학|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년 ~ 1814년)은 <진수전>에서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를 욕보였기 때문에 진수가 제갈량의 병법을 까내렸다는 기록에 대해서, '''"이건 진짜로 무식한 소리다!"'''[* 《22사차기》권 6·<삼국지>: ... 此真無識之論也![[http://ctext.org/wiki.pl?if=gb&chapter=573743#p111|출처]]]라고 평했다. 다음은 조익의 해당 평가. >이십이사차기 진수론제갈량(陳壽論諸葛亮): > >([[진서]]) 진수전(陳壽傳)에서 "진수의 부친은 마속(馬謖)의 참군(參軍)으로, 마속이 제갈량에게 주살당하며, 진수의 부친 또한 곤형을 당했기에, 진수는 제갈량전을 쓰며, 장수의 지략이 장기가 아니라고 일렀다." 라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무식한 견해다! 제갈량의 미칠 수 없는 점은, 원래 반드시 용병으로 장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수가 제갈집(諸葛集)을 교정하고 상표한 것을 보면, 말하길 "제갈량은 법과 가르침이 엄명하고, 상벌은 반드시 신용할 수 있으며, 악한 이는 징계하지 않는 게 없었고, 선한 이는 드러내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심지어 관리는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길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양(梁), 익(益)의 백성들은, 비록 감당(甘棠)의 [[소공석|소공(召公)]]을 읊는 거나, 정인(鄭人)들이 [[자산(춘추시대)|자산]]을 칭송하는 것도, 넘을 수 없습니다." > >또한 제갈량전의 후미에 평하길 “제갈량의 다스림은, 성심을 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며, 선한 이는 숨겨 상을 주지 않는 일이 없었고, 악한 이는 아끼며 물리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마침내 나라 안에선, 모두 그를 경외하며 사모하였다. 형벌과 정치는 비록 엄하나 원망하는 이가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함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 >그가 공명을 칭송함은, 유독 그의 대단함을 보인 거라 이를 수 있다! 또한 [[양홍]]전(楊洪傳)에서 이르길 “서쪽의 땅에선 모두 제갈량이 당시 사람들의 기량을 다하게 할 수 있음에 감복했다." [[요립]]전(廖立傳)에서 이르길 "제갈량이 요립을 폐해 서민으로 삼았다. 제갈량이 죽으니, 요립이 울며 이르길 '나는 결국 미개인이 됐구나!'" 이평([[이엄]])전(李平傳)에서 또한 이르길 "이평이 제갈량에게 폐해졌다. 제갈량이 죽으니, 이평은 마침내 발병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있으면 마땅히 저절로 개선돼 돌아갈 거라 기대하며, 후인들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진수가 또한 [[맹자]](孟子)의 말을 인용하니 "편안한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어도 죽인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는 진실로 왕좌(王佐)의 심사(心事)라 말할 수 있다. > >심지어 용병하여 이길 수 없던 것도, 또한 명백히 말하길 "대적한 바가, 어떤 이는 인걸(人傑)이라 할 만하고, 거기다 무리가 적어 같지 않고, 공수의 입장이 다르고, 또한 당시에 명장이 없었기에, 공업이 성하다 쇠하게 한 것이고, 또한 천명이 돌아감이 있어, 지력으로 싸울 수 없었습니다." 진수는 사마씨에 관해 피하고 보호한 것이 가장 많았기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건괵을 보내고,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일 등을, 열전 안에 모두 감히 쓰지 못했다. > >그러나 지론이 유독 이와 같으니, 그가 제갈량에게 탄복함이 깊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부친이 곤형을 당한 까닭에, 이를 구실로 폄하했다고 이르는 것은, 진실로 경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제갈첨]]에게 무시를 당해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것인데 이는 오해다. 특히 제갈량 같은 경우 진수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점이 아닌 것 같다.' 라고 그의 전술적 역량이 [[정치]]력에 비해서 못했을 뿐이라고 했고, 이조차도 모자랐다거나 무능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다 좋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뉘앙스다. 정치에 관해서는 [[관이오|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고 하는 등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했다. 재상으로서 두 인물이 중국 역사상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진수가 제갈량을 편애한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제갈량전 분량 자체도 다른 열전에 비교해봐도 서술량이 상당히 많다.[*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제갈량전은 선주전보다도 길다. 제갈량전보다 긴 것은 무제기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진수가 사마염에게 사죄와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내용이 상주문(上奏文)에 있다. 제갈량전 말미 상소문에서 진수는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고 하여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제갈첨에 관해서도 안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부정적인 면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제갈량) 덕에 본인의 공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칭송을 받는다고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알려진 것보다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제갈첨의 승진이 워낙 빠른 것도 있고 미처 재주를 펼치기 전에 젊은 나이로 전사했으니 그의 위치에 비해 공적이 부족했던 건 어쩔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https://www.fmkorea.com/best/907000359|삼국지 정사에서 이례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던 두 사람]]이라는 고찰글도 참고하면 좋다. 저자 본인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정의(삼국지)|정의]], [[정이]] 형제는 [[위(삼국시대)|위]]의 이름난 사람인데, 진수가 정의와 정의의 자식들에게 쌀을 주면 아비와 숙부의 열전을 써주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해 《삼국지》에 이 '정씨 형제'의 전(傳)이 없다는 설이다. 다만 정의를 비롯한 그의 가문은 남자들이 모두 다 조비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후손이 있을 수가 없어서 모순되는 내용인지라 처음부터 꾸며진 이야기라든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진수와 정의 형제의 이야기로 와전되었거나 살롱문학처럼 후대의 호사가들이 당시에 도는 이야기를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로 개작하는 등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진수는 정씨 형제보다는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이양]]이나 진수와 동시기 촉한에서 관료로 일했던 관헌, 동문들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단적으로 나헌이나 이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서에 거의 열전급의 기록이 있음에도 진수가 기록하지 않아서 [[배송지]]가 [[나헌]]은 양양기에서, 이밀은 [[화양국지]]에서 주석을 따와서 붙여야 했을 정도. [[화양국지]]에 진수의 동문들이나 같이 이동했던 촉한의 관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진수가 [[이양]] 등을 비롯해 낙양에 동행했던 촉한의 관료, 동문들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기록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기전을 적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둘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나헌의 경우는 촉에서는 황호와의 불화 때문에 커리어가 꼬여서 촉한 멸망 이후 위의 관리로서 영안 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이밀 역시 진에서 요직에 오른 인물이라 촉서에 적기에는 지나치게 후대의 사람이라 판단해서 넣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촉서의 인물들 중 그나마 후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게 [[초주]]나 [[극정]]인데, 초주의 경우는 촉한 멸망 이후 별활약 없이 병에 걸려 270년에 사망했고, 그나마 극정이 진에서도 요직을 맡았지만 촉에서 훨씬 오랫동안 주요 관직에 있었고, 촉한 멸망 후에도 한동안 유선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촉서에서도 스승인 [[초주]]와 [[극정]]을 비롯한 학자들의 열전과 역사의 큰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해당 학자들의 학문적 업적과 논의들을 기술한 것이 의외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진수가 사관으로서 편파적이고 공정치 못한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의심을 더하기도 하는 모양. 다만 [[양희]]의 계한보신찬전을 그의 열전에 전문 게재하면서 촉서 본편에서 다루지 못한 이들의 출신과 행적을 꼼꼼하게 덧붙인 것을 살피건대 본디의 출신이자 망국으로서의 촉한에 그 나름대로의 애정이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 진수의 어쩔 수 없는 소심함과 그로 인해 발생했던 분쟁이 그와 정사 삼국지를 휘감고 공정성 논란을 빚게 했지만, 일단은 그 소심한 성격과 지인들과의 불미스러운 다툼 그 자체가 역사로서의 정사 삼국지의 격을 떨어뜨린 일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장화(삼국지)|장화]]의 격찬을 받고 [[하후담]] 또한 시원하게 패배 선언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정사 삼국지 공정성의 문제는 주로 삼국이 각자 황제와 천의를 자처하고 있던 전제군주제라는 시대적 배경과 진수가 패배한 반역의 망국 출신이라는 사관으로서 몹시 위태로운 출신 배경이었던 데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승자의 역사'에 의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한 한편 신하인 사마소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시해된 황제 [[조모(삼국지)|조모]]의 죽음 또한 [[위략]]의 [[어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동참할 수 있었음에도 그 나름대로 에둘러 표현해 남기고 읽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똥배짱도 저지른 의외의 면모도 있다.] 저자에 얽힌 문제들은 [[진수(역사가)|진수]] 문서에서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항목도 참조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