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 == 삼국의 이야기 말고도 <위지>의 끝 부분에는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라고 하여 오환, [[선비족#s-3|선비]], [[동이]], [[왜#s-2|왜]][* 왜인전도 고대 [[일본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등 중국 밖의 이민족 세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시대 사서인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한무제]]의 조선 원정과 그 멸망 과정만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한반도]] 일대의 [[고대#s-1|고대]] [[국가#s-1|국가]]에 관한 위치와 사회상, 풍속까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지》의 <동이전>이 된다. 게다가 '''한국의 삼국시대와 가장 인접한 시기에 작성되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한반도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부여, 옥저, 동예, 초기 고구려, 삼한 등의 정치사, 문화 등이 여기에 있는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오환선비동이전 전문 ([[https://ctext.org/text.pl?node=603321&if=en&remap=gb#n603323|링크]]) {{{#!folding 【내용 펼치기·접기】 {{{#!wiki style="text-align:center" 《乌丸鲜卑东夷传》}}} 书载“蛮夷猾夏”,诗称“猃狁孔炽”,乆矣其为中国患也。秦、汉以来,匈奴乆为边害。孝武虽外事四夷,东平两越、朝鲜,西讨贰师、大宛,开卭苲、夜郎之道,然皆在荒服之外,不能为中国轻重。而匈奴最逼于诸夏,胡骑南侵则三边受敌,是以屡遣衞、霍之将,深入北伐,穷追单于,夺其饶衍之地。后遂保塞称藩,世以衰弱。建安中,呼厨泉南单于入朝,遂留内侍,使右贤王抚其国,而匈奴折节,过于汉旧。然乌丸、鲜卑稍更强盛,亦因汉末之乱,中国多事,不遑外讨,故得擅汉南之地,寇暴城邑,杀畧人民,北边仍受其困。会袁绍兼河北,乃抚有三郡乌丸,宠其名王而收其精骑。其后尚、熈又逃于蹋顿。蹋顿又骁武,边长老皆比之冒顿,恃其阻远,敢受亡命,以雄百蛮。太祖潜师北伐,出其不意,一战而定之,夷狄慑服,威振朔土。遂引乌丸之衆服从征讨,而边民得用安息。后鲜卑大人轲比能复制御群狄,尽收匈奴故地,自云中、五原以东抵辽水,皆为鲜卑庭。数犯塞寇边,幽、并苦之。田豫有马城之围,毕轨有陉北之败。青龙中,帝乃听王雄,遣劒客刺之。然后种落离散,互相侵伐,强者远遁,弱者请服。由是边陲差安,汉南少事,虽时颇钞盗,不能复相扇动矣。乌丸、鲜卑即古所谓东胡也。其习俗、前事,撰汉记者已录而载之矣。故但举汉末魏初以来,以备四夷之变云。 魏书曰:乌丸者,东胡也。汉初,匈奴冒顿灭其国,馀类保乌丸山,因以为号焉。俗善骑射,随水草放牧,居无常处,以穹庐为宅,皆东向。日弋猎禽兽,食肉饮酪,以毛毳为衣。贵少贱老,其性悍骜,怒则杀父兄,而终不害其母,以母有族类,父兄以己为种,无复报者故也。常推募勇健能理决鬬讼相侵犯者为大人,邑落各有小帅,不世继也。数百千落自为一部,大人有所召呼,刻木为信,邑落传行,无文字,而部衆莫敢违犯。氏姓无常,以大人健者名字为姓。大人已下,各自畜牧治产,不相徭役。其嫁娶皆先私通,畧将女去,或半岁百日,然后遣媒人送马牛羊以为聘娶之礼。婿随妻归,见妻家无尊卑,旦起皆拜,而不自拜其父母。为妻家仆役二年,妻家乃厚遣送女,居处财物,一出妻家。故其俗从妇人计,至战鬪时,乃自决之。父子男女,相对蹲踞,悉髠头以为轻便。妇人至嫁时乃养发,分为髻,著句决,饰以金碧,犹中国有冠步摇也。父兄死,妻后母执嫂;若无执嫂者,则己子以亲之次妻伯叔焉,死则归其故夫。俗识鸟兽孕乳,时以四节,耕种常用布谷鸣为候。地宜青穄、东墙,东墙似蓬草,实如葵子,至十月熟。能作白酒,而不知作麴糱。米常仰中国。大人能作弓矢鞌勒,锻金铁为兵器,能刺韦作文绣,织缕氊𣮷。有病,知以艾灸,或烧石自熨,烧地卧上,或随痛病处,以刀决脉出血,及祝天地山川之神,无针药。贵兵死,敛尸有棺,始死则哭,葬则歌舞相送。肥养犬,以采绳婴牵,并取亡者所乘马、衣物、生时服饰,皆烧以送之。特属累犬,使护死者神灵归乎赤山。赤山在辽东西北数千里,如中国人以死之魂神归泰山也。至葬日,夜聚亲旧员坐,牵犬马历位,或歌哭者,掷肉与之。使二人口诵呪文,使死者魂神径至,历险阻,勿令横鬼遮护,达其赤山,然后杀犬马衣物烧之。敬鬼神,祠天地日月星辰山川,及先大人有健名者,亦同祠以牛羊,祠毕皆烧之。饮食必先祭。其约法,违大人言死,盗不止死。其相残杀,令都落自相报,相报不止,诣大人平之,有罪者出其牛羊以赎死命,乃止。自杀其父兄无罪。其亡叛为大人所捕者,诸邑落不肯受,皆逐使至雍狂地。地无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虵,在丁令之西南,乌孙之东北,以穷困之。自其先为匈奴所破之后,人衆孤弱,为匈奴臣服,常岁输牛马羊,过时不具,辄虏其妻子。至匈奴壹衍鞮单于时,乌丸转强,发掘匈奴单于冢,将以报冒顿所破之耻。壹衍鞮单于大怒,发二万骑以击乌丸。大将军霍光闻之,遣度辽将军范明友将三万骑出辽东追击匈奴。比明友兵至,匈奴已引去。乌丸新被匈奴兵,乘其衰弊,遂进击乌丸,斩首六千馀级,获三王首还。后数复犯塞,明友辄征破之。至王莽末,并与匈奴为寇。光武定天下,遣伏波将军马援将三千骑,从五原关出塞征之,无利,而杀马千馀匹。乌丸遂盛,钞击匈奴,匈奴转徙千里,漠南地空。建武二十五年,乌丸大人郝且等九千馀人率衆诣阙,封其渠帅为侯王者八十馀人,使居塞内,布列辽东属国、辽西、右北平、渔阳、广阳、上谷、代郡、雁门、太原、朔方诸郡界,招来种人,给其衣食,置校尉以领护之,遂为汉侦备,击匈奴、鲜卑。至永平中,渔阳乌丸大人钦志贲帅种人叛,鲜卑还为寇害,辽东太守祭肜募杀志贲,遂破其衆。至安帝时,渔阳、右北平、雁门乌丸率衆王无何等复与鲜卑、匈奴合,钞畧代郡、上谷、涿郡、五原,乃以大司农何熈行车骑将军,左右羽林五营士,发缘边七郡黎阳营兵合二万人击之。匈奴降,鲜卑、乌丸各还塞外。是后,乌丸稍复亲附,拜其大人戎末廆为都尉。至顺帝时,戎末廆率将王侯咄归、去延等从乌丸校尉耿晔出塞击鲜卑有功,还皆拜为率衆王,赐束帛。 }}} 한국에서 직접 집필한 역사서 중에서 현재까지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지금은 유실된 옛 기록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나, 편찬연대로 따지면 동시대에 집필된 삼국지의 내용과는 거의 800~1,0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가, 초기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쓴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전([[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역사 학계에선 삼국시대 초기는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마한]]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시기, 즉 [[기원전]] 시점에 이미 백제에 의해 멸망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한참 뒤인 3~4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의 결과는 6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에 백제와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물론 지금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다수 발굴됨에 따라서, 100%까지는 아니라도 일제강점기에 거의 무시되던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신뢰를 받게 된 상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왜인전>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다만 《삼국지》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바다 건너의 정보들을 모아 쓴 것이므로 그리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가장 큰 단점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이 자국의 시점으로 가공한 자료라는 점. 특히, 주석을 단 배송지가 원래 《[[위략]]》에 실려있던 기사들을 편집 축약한 내용을 달아았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부여]]와 [[고구려]]의 나라 묘사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간다. 부여 사람들의 풍습은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대놓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에 맛들인 음탕한 족속으로 적어 놓았다. 이는 부여가 중국과 친했던 반면 고구려는 사이가 안 좋았던 적이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여부에 따라 설명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그런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내성 일대의 험한 산골짜기 사이 압록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라라서 [[관구검]][[비류수 전투|에게 발린 이야기]] 정도만 나와 있다. 풍습을 보고 "음란하다." 라고 서술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민족을 경시하는 [[중화사상]], 체통머리 없는 것을 혐오하는 [[유교|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여기서 淫이라는 것은 중국과 다르다는 뜻이며,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뜻은 후대에 생긴 의미이다. [[삼한]] 또한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한군현에 가까운 곳의 나라들은 예의를 알았지만 먼 곳의 나라들은 죄수나 노비와 같은 자들이 모여살았다고 서술[* '그 나라 북방(北方)의 군(郡)에 가까운 제국(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되어있다. >書籍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 >책으로는 [[십삼경 |오경]], 삼사[* [[사기(역사책)|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양추[* 진(晉)나라의 손성(孫盛)이 쓴 진나라 역사서]가 있다. >---- >《주서(周書)》권 49·<이역상(異域上)>·<고구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10r_0010_0010_0050|출처]]] 《북주서》(즉 《주서》)에 따르면, '''후대의 고구려 사람들도 삼국지를 읽었다.'''[* 북주서는 628년에 지어진 책이므로 고구려 사람들이 읽은 삼국지는 [[배송지]]주 삼국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에 담긴 고구려(초기)를 비하하는 내용을 후기 고구려인들이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견훤]]을 [[왕건]]이 비판할 때 [[후소제(후한)|소제]]를 죽인 [[동탁]]에 비유한 것처럼, 삼국지는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부터는 한국 지식인들의 기본 교양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