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 (문단 편집) === 삼국의 순서 === 우선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순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이렇게 부르는 기준은 상당히 애매한 편이고 주로 많이들 하는 설명이 고대 국가로서 자리잡은 순서[* 고구려- [[1세기]] [[태조대왕]], 백제-[[3세기]] [[고이왕]], 신라-[[6세기]] [[지증왕]]]를 기준으로 한다고들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나다]]순으로도 고백신 순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신의 순서가 자리잡힌 것은 길게 봐야 해방 후 대한민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이다. [[고려시대]]~[[조선시대]] 내내 통용된 삼국의 순서는 통상적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본기 순서이기도 하고 그외 고려와 조선의 여타 사서에서도 주로 이 순서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기준은 우선 '''건국 연도 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준으로 신라는 BC 57년,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었다.]이다. 삼국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순서로 기재하는 것이 합당하는 의견. 다만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후대에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로 맞추기 위하여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학계에서도 삼국사기 내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보다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연대적 신뢰성을 낮게 책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고구려는 한국보다 더 먼저 기록문화가 자리잡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접해 있어서 초기 기록부터 [[교차검증]]이 되는데[* 여기서 교차검증이라 하면 기원전 1세기 후반~서기 1세기 초반 무렵 고구려 왕조의 존재가 교차검증된다는 뜻이지 고구려본기 기사 하나하나가 신뢰성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 왕망에게 죽은 고구려후 추를 삼국사기의 연비로 보는 학자가 그리 많지도 않고 서기 1세기~2세기 무렵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계보 또한 그대로 취신하는 경우가 전무하다.] 백제와 신라는 그렇지 않고 3세기에 와서야 그 존재가 삼한 78개국의 일원 정도로나마 교차검증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연대의 경우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삼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의도적으로 고구려보다 늦은 자신들의 국가 생성 연대를 고구려보다 20년 앞서 소급시키고 초기 국왕들의 재위기간도 늘여서 본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해석이 꽤나 지배적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 심리상 당연한데 신라인 입장에서 100~200년 후에야 형성된 본인들 국가가 고구려를 제치고 통일했다고 하면 삼한일통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도 있기에 본인들 국가가 삼한 중 가장 정통성 있는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하다.] 실제로 신라가 건국 및 초기사 연대를 선대로 소급한 간접적인 흔적은 삼국사기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삼국사기상 [[혁거세 거서간]]이 신라를 건국한 연도(기원전 57년)는 고구려의 건국 연도(기원전 37년)가 포함된 육십갑자의 첫 해이다. 그리고 혁거세 거서간은 정확히 그 육십갑자가 지나는 서기 4년에 사망하는데 상당히 인위적인 개입이 들어간 듯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그외에도 출생 이전에 신라로 건너온 [[탈해 이사금]]의 이야기나 조손관계인 [[박아도]]와 [[박제상]]의 활동 연대가 2세기가 넘게 차이나는 등 말이 안되는 기록들이 초기 기사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편 백제의 경우에도 그 건국시조인 온조 혹은 비류를 고구려 건국왕 주몽의 연대와 맞추기 위해 백제 왕실 측에서 의도적으로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 실제 이러한 점은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의 문제에서도 확인되는데 백제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역사 소급의 원조가 백제였을 수도 있다. 사실 원조를 따질 것도 없는게 심리상 국가의 신성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초기사의 왜곡, 각색이다.] 실제 [[온조왕]] 이후 초기 국왕들의 재위 연대가 평균적으로 40~50년을 상회하는데 이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 참고로 조선조 500년의 국왕 27명 중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이 52년간 왕위를 지킨 [[영조]]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대로라면 영조급 군주가 건국 초기부터 연속적으로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신라와 백제 초기 국왕들의 비정상적인 재위기간 및 모순적인 연대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상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다.'''[* 물론 고구려의 기원전 37년도 아주 정확한 연대는 아닌게 [[구려후 추]]를 [[동명성왕]]으로 해석하면 고구려 역시 건국연대가 30년 가량 뒤로 밀린다. 그러나 [[구려후 추]]는 동명성왕(추모왕)을 가리키는 것은 맞지만 해당 사건 자체는 중국 신나라측의 프로파간다라는 주장이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의 정설이고 당장 후대의 중국 역사가들도 이것이 왕망의 프로파간다가 아닌가 사실 여부를 의심하였다. 무엇보다 5세기 초반에 제작된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주몽이 처형된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서 임종을 기록하면서 고명세자(顧命世子)인 유류를 언급하면서 [[구려후 추]]와 관련된 내용을 전면부정하고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고명(顧命)인데 고명은 왕이 임종 직전에 왕자와 신하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남기는 말로 이에 의하면 '''주몽은 중국 신나라 장수의 유인책에 처형당하고 목이 장안성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은 사실일 수가 없다.'''[* 이 두 기록(광개토대왕비, 후한서 고구려전)은 끼워맞추는게 불가능하니 둘 중 하나는 거짓이라고 보아야한다.] 또한 호동왕자 설화로 대표되는 [[대무신왕]] 시기 [[낙랑국]]의 정복,(낙랑군으로 해석할 시 온조왕의 마한 정벌 기사 마냥 논란이 있다.) [[태조대왕]]부터 [[신대왕]] 시기에 집중되는 비정상적인 수명 및 재위기간을 고려하면 고구려본기의 연대도 그대로 취신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고대사라는 한계를 고려해 봤을때 반세기 미만으로 연대가 차이난다는 점에선 셋 중 그나마 양반이다.][* 참고로 북한의 경우 고구려 역사 900년을 주장하면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올렸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무리수라 볼 수 있다. 기원전 277년이면 아직도 단군조선이 엄연히 한반도 북부를 통치하던 시기이고 중국에선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기도 이전이다.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이 시기부터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을 리는 없다. 물론 고구려현의 존재는 분명 BC 37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는 중국사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현과 고구려 왕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사학계에서도 후대의 고씨 고구려 왕조가 국명을 선대에 존재하던 지명에서 가져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 역사는 딱 700년 전후 정도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에 기원전 37년 전후가 딱 적당하다. 실제로 고구려 역사가 700년 정도라는 사실은 한중일 역사서에서 모두 교차검증되는데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도 고구려 역사가 700년이라는 언급은 많다. 한서에서 기원전 107년이나 기원전 75년에 등장하는 구려 역시 고구려의 원형이 되었음은 자명하지만 고구려 왕조와 동일한 정치체로 보는 것은 무리인게 고구려인들 본인부터가 기원전 75년보다 확실히 이후인 [[동명성왕]]을 시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의 연대 신뢰성 문제는 12세기 당시 전해지던 원전 자체의 문제이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등 편찬자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이미 김부식의 손에 들어온 원전에서 비롯된 신뢰성 문제를 훨씬 후대 사람인 김부식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오히려 삼국사기 곳곳에서 김부식이 의문을 남긴 흔적이 종종 있을 정도로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도 모순적인 기년에 대해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 남겨놓은 공문서와 사서같은 원사료들은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의 전란속에 다수가 소실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김부식의 시대가 되면 대다수가 2차 인용된 사료들이 주로 남은지라 김부식으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준은 '''한국사에서의 중요성과 비중''' 문제이다. 신라 자신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신라가 삼국을 첫번째로 통일하였고[* 당시 발해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때도 고려 때도 고구려의 한 방계 일파 정도로는 쳐줬지만 고구려를 이은 정통 왕조라고 보진 않았다.] 현대 한반도 국가의 원형이 [[통일신라|676년에 탄생했기에]] 신라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신라를 가장 앞에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당과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아 한민족 세력의 대표주자로 대외적으로 공인받았고 훗날 고려의 국호와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조선시대 내내 외적의 침입에 시달릴 때마다 정신적 향수를 제공하였기에, 아무래도 존재감이 미미한 백제보다는 후대 영향력이 앞선다 할 수 있어 순서상 백제보다 앞에 놓인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고 신라는 물리적 통일만 하였다 뿐이지 삼국 유민의 독자적 국가정체성을 소멸시키진 못하였기에 분명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삼국의 통치를 모두 받아본 경기 지역이 신라, 백제가 아닌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경기 지역은 BC 18년 백제의 건국 시점부터 475년 한성백제의 몰락 시점까지 500여년간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흐름의 지배를 받았고 553년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부터 901년 궁예가 봉기하기까지 300년 넘게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 지역이 택한 나라는 백제나 신라가 아닌 1세기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해본 고구려였다. 이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한반도에서 얼마나 큰 위상을 가졌는지를 상징하는 바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최초로 완수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발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국체는 668년에 끝난 반면 신라의 국체는 훨씬 후대인 935년까지 이어졌기에 적어도 직접적인 영향력은 신라가 강했던 건 사실이다. 따라서 후손들 입장에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를 근거는 타당했다. 이처럼 삼국을 부르는 순서에서 우리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반영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신라의 삼한일통과 한반도 통일 왕조의 원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신라를 배려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발해]]가 어느 정도 재조명이 되고, 또한 근현대사가 비참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지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차지하지 못한 신라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현대 한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부르는 경향이 잦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