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 (문단 편집) === 삼국의 국력 === 국력을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현대 국가를 대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전근대 역사, 자료의 유실이 극심한 고대 한국에서 국력을 계량적으로 단서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많은 면에서 고구려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일 대 일로 비교하면 가장 강대국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고 그것은 당대 이래로 쭉 내려온 인식도 그러하다.[* 여전히 [[이도학]] 등 일부 학자들은 백제 멸망 당시 인구 76만호, 620만구 등의 기록을 취신하며 멸망 당시 70만호였던 고구려보다 백제가 체급 면에서 큰 국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인구 70만호와 백제 76만호의 기록을 대하는 학자들의 태도는 취신하는 학자의 수효가 적지 않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논박을 통해 보수적인 설에 비해서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통설이라 할 정도의 추세에 있다는 점에서는 후자와 다른 점이 있다.][* 3세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중국에 의해 대략적으로 파악된 고구려 강역의 인구는 백제+신라 강역의 인구 대비 2~3배에 달한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하삼도의 인구가 북삼도의 인구의 1.5~4배에 달한다. 이렇듯 쟁점이 되는 7세기 무렵과는 시차가 있고 이에 따라 영토의 영유, 개발 정도가 다를 수 있고 무엇보다 전근대 인구 조사 자체가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간접적인 단서 정도로만 볼 수 있다.] 비록 인구에 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라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국토 면적과 그에 따른 종심 방어의 유불리, 북방 민족의 동원 여부, 강대국들과의 오랜 실전 경험, 선진 문화에 대한 접근성 등등 고구려가 남부의 나제 양국보다 우위를 점할 요인이 많기 때문에 고구려의 국력 우위가 설명되지 않는건 아니다. 이러한 고구려 1강 체제는 백제와 신라의 전성기로 알려진 4세기와 6세기에도 예외는 아닐 수 있다. 백제나 신라가 약진하고 양면전선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원 왕조 및 북방 유목민과 접하면서 남는 여력으로 나제를 상대하는 고구려의 상황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북방민족만큼 강력한 세력은 아니지만 나제의 후방에도 백제 뒤에는 전성기를 맞아 호남을 잠식해나간 [[대가야]]가 있었고 신라의 뒤에는 꾸준한 왜군의 침공이 있었기는 하다.] 무엇보다 근초고왕 사후 백제는 고구려와 접한 북방 영토를 빠르게 상실했고 진흥왕 사후 신라도 북방 영토를 일부 잃었던 반면 고구려는 150여년간이나 전성기 영토를 유지하였기에 지속성 측면에서 5세기 고구려의 업적을 4세기 백제나 6세기 신라의 스퍼트보다 우위로 볼 여지가 있다. 외교적인 대우나 국제적인 위상에서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전략적인 면, 쇠퇴기에 겹치면서 백제 [[무령왕]] 시기에 봉작의 품계가 뒤집힌 것은 한 순간 있었다.] 군사력 측면에서도 30만 대군을 여러차례 동원하는 고구려와 비교해서 최대 병력 동원이 수만에 남짓한[* 668년 신라의 20만 동원 기록을 부정하는 경우. 668년의 신라는 '삼국시대 신라+백제 일부+[[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인구'가 더해진 상태기 때문에 참작할 필요가 있으나, 그 외에 신라와 백제의 중요 전쟁에서 보여주는 병력 동원은 대체로 5만 플러스알파 정도다.] 신라, 백제와는 양적인 차이가 현격하며 질적으로도 중국이나 유라시아 교역로와 가까워 선진 문물과의 접촉이 많아 최신화가 빠르고 전투력이 탁월한 북방을 다양하게 아우르며 한국사상 다른 시기에는 상상조차 힘들 정도의 전과를 쌓아올림으로써 증명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드넓고 험한 북방에서도 패권을 유지한 명실상부한 강대국이었다.[* 여제 양국이 멸망할 당시 고구려의 고토에는 1도호부 9도독부가 설치되었고 백제의 고토에는 1도호부 5도독부를 설치하려다가 1개 도독부를 설치하는데 그쳤다. 책임자의 위상도 대장군급 이상이던 안동도호부와 중랑장급이던 웅진도독부 사리에는 격차가 있었다. 물론 도독부를 철저하게 인구비례로 설정하는 건 아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를 9개, 백제를 1~5개로 파악했던 것을 두 나라의 체급이나 위상에 대한 참고사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멸망 이후 요인들에 대한 예우도 백제에 비해 격차가 있다는 것도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력 순서대로만 보면 고구려가 순탄하게 삼한을 통합해야 했으나 그런 일 없이 오랜 기간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한국을 병합할 역량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원리로, 고구려는 중원, 몽골 방면의 세력을 맞댄 이중, 삼중의 전선을 감당하면서 남한에 투사할 여력까지 갖추지는 못했다. 사실 남한 일대의 역량도 상당한 수준이라 일치단결해서 우주방어를 실천하면 고구려는 물론이고 당조차도 이를 뚫고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1:1 국력으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양면/삼면전선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일원적 정치체를 구축할 국력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우열에 관해서는 미궁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논란의 기록이지만 파편적인 인구 기록이라도 있는 백제와 달리 신라의 경우 그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 직전까지도 신라에 쭉 공세를 유지했고 누적적으로 한 세대 동안 투사한 군사력 역시 만만치 않다. 신라는 백제 멸망 5년 전에도 신라를 작은 세력, 백제를 큰 세력으로 지칭하였던 만큼 백제의 우위를 말할 근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의 수세적 상황은 대륙에서의 고구려의 경우와 비슷하게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2중 3중 전선이 되어버린 형세에 기인한 신라의 수세로 볼 수도 있다. 오히려 삼국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른 7세기 중반 기준 현재 행정체계상 충남, 전북, 전남, 경남 서부를 가진 백제보다 경북, 경남 중~동부, 충북, 경기, 강원을 가진 신라가 1:1로는 약간 더 우위였다고 해석할 근거 또한 있다. 누적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신라는 백제 멸망 당시 5만, 고구려 멸망 당시 20만[* 이 경우에는 특이값으로 신뢰성이 낮다고 보기도 한다.] 대군을 발하는 등 역시 만만치 않는 역량을 지녔다고 볼 만한 근거도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백제 인구 76만호, 620만구 등의 기록을 취신하여 고구려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분명 있긴 있다. 이 경우에는 또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후방을 위협하는 [[왜국]]도 삼국시대 거의 내내 백제 편을 들어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동해]] 바다와 멀지 않은 경주에 중심지가 있는 신라는 항상 후방에 예비 병력을 남겨둬야 했을 것이므로 백제와 전력으로 싸울 여유가 없었던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게다가 [[관산성 전투]]나 [[가야멸망전]]처럼 아예 백제군과 일본군이 합류해서 연합군을 편성해 신라와 싸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