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산둥성 (문단 편집) === 고대 === 지금이야 [[중국]]의 심장부에 있어서 상상하기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기점으로 중원에 동화되기 이전에는 중원이라고 불리는 [[허난성]] 일대의 주민들과는 별개의 문화(웨스문화 岳石文化)와 정체성을 지닌 '래이'(來夷)라는 [[동이족]]계 이민족이 살고 있었고, [[상나라]]-[[주나라]] 시기에는 산둥성 일대에 수많은 성읍국가들을 형성해나갔다. 이들을 통칭해서 동이라고 불렀고 한민족도 후에 동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이때는 다르게 동이족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한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상나라와 주나라 동쪽에 살던 여러 종족들을 통칭한 개념인데다가 한반도에서도 수많은 부족-군장국가가 난립해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관계가 있다하더라도 공통의 정체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한반도 이북에 살던 [[흉노]], [[동호]]와 같은 튀르크, 몽골계 민족들과 [[숙신]]과 같은 퉁구스계 민족들은 동이가 아닌 [[북적]](北狄)으로 분류되었다.] 이 래이라는 이민족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뚜렷하게 우세를 점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나라와 노나라,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에게 완전히 잠식당하여 서쪽 [[허난성]] 일대를 중심으로 발원한 초기 중국에 완전히 흡수된다. 중원과 위도가 같고 기후지형적 환경이 비슷해서 중원 동서남북 중에서는 가장 먼저 동화, 편입되었다. 하지만 가운데 [[황해]]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지리적 인접함 때문에 한반도와 교류가 잦았던 것은 사실로, 고대로부터 산둥지역 주민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반대로 한반도에서 산둥지역으로 이주한 경우는 빈번했다. 산둥성에서 한반도 스타일 [[고인돌]]이 발견된다던가, 반대로 [[초한쟁패기]] 때 제나라 주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며[* [[사기(역사책)|사기]] 조선열전.] 그 이후로도 [[백제]]가 [[고이왕]] 시기 [[요서 경략설|요서를 비롯하여 산동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계와 [[발해]]계 유민들이 산둥성 일대에 대거 정착해 [[이정기]]의 [[제나라#s-6]]를 세웠고 [[신라]]인들도 산둥성 해안도시에 정착해 [[신라방]]을 차려 한중일 삼각무역을 했다. 어쨌든 춘추전국시대에 산둥성 지역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이합집산을 거치며 점차 통합되어나가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 시절에 산둥 성 지역에 위치한 나라로 [[노나라]]와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가 있다. 노(魯)나라는 그 유명한 [[공자]]의 출신지이고[* 그런데 이 미칠 듯한 네임밸류와는 달리 노나라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보잘 게 없는 작은 나라였다.] 제(齊)나라는 한때 전국시대 최강의 자리를 거머쥐었던 강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서쪽의 [[진(통일왕조)]](秦)이 폭풍처럼 성장해 세력다툼에 밀려 멸망하고 만다.[* 그래서 산둥성의 자동차 번호판은 鲁를 쓰는데, 이게 여기서 따온 것으로 지역별 분류는 다음에 오는 알파벳으로 구분한다. 지난시는 鲁A, 칭다오는 鲁B 이렇게. 하단부의 鲁Q는 [[린이]] 지역의 번호판이다. [[파일:external/img5.imgtn.bdimg.com/u=772827718,1276754095&fm=21&gp=0.jpg]]] 삼국지에서 [[공융]]이 자사로 있었던 청주가 바로 산동 반도다. [[백제]] [[위덕왕]]이 당시 중국에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이 '동청주'가 바로 중국 '산동지방'이었다. 당시에는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나라]] 시기에는 [[요서]] 지방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할 때 사용했던 항구들이 있었던 곳 중 하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