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충신 (문단 편집) === 임진왜란 발발과 김득기, [[송빈]], 이대형 ===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군은 부대를 3개로 나누어 3방향으로 진격 하였는데, 그 중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4월 14일]] [[다대포]]를 경유해 죽도(가락면)에 도착했다. 제3군은 내륙의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 김해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김해에 전해지자 김해부사 [[서예원]]은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에게 이 상황을 알렸고 [[의령군]], [[함안군]], [[합천군]] 등지의 지방관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또, 김해지역의 유지인 [[송빈]]과 이대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송빈]]은 [[서예원]]이 일본군의 침략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하자 장남에게 집안을 맡기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해부사는 송빈을 중군도총으로 삼아 해서문(서문)을 지키게 하였다. >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되고, [[영남]]을 잃으면 [[조선|나라]]가 모두 [[일본|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 > <[[송빈]]이 김해성으로 들어가며>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보이며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살다간 이오의 6대손은 이대형은 빈번히 [[과거시험]]에 떨어지자 신어산 아래에 관천재를 짓고 살며 양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이후 서예원의 청을 받은 뒤 마을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서예원|김해부사]]는 이대형에게 공진문(북문)을 지키게 하였다. >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 <이대형이 두 아들에게 남긴 말> 일찍 [[무과]]에 급제했으나 당시 [[당쟁]]이 난무하고 있어 중앙 [[관직]]에 뜻을 두고 않고 농사를 짓던 김득기는 친구인 이대형과 [[송빈]]이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김해성으로 향하였다. 김해부사는 김득기에게 해동문(동문)을 지키게 하였다. [[합천]]에서 초계군수 이유검이 병사를 이끌고 오자 중위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