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천시 (문단 편집) == 역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전까지는 사천군과 곤양군이라는 별개의 고을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가야]]의 사물국(史勿國)과 군미국(軍彌國)으로, [[포상팔국의 난]]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나름 세력이 있었던 소국이었다. 이후 [[신라]] [[법흥왕]]대에 신라에게 정복당해 각각 사물현(史勿縣)과 포촌현(浦村縣)이 된다. [[남북국시대]]에는 신라 [[경덕왕]]대에 전국 지명 한화 정책에 따라 각각 사수현(泗水縣)[* 음차(勿, 물)를 훈차(水, 물 수)로 바꾼 것. 즉, 다른 이름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그냥 한자식으로 다듬은 것이다.]과 하읍현(河邑縣)이 된다.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고려)|현종]]이 어린 시절 아버지 [[안종(고려)|왕욱]]의 유배지였던 사수현에서 지낸 인연으로, 즉위 후 1011년 사수현을 사주로 고쳐 불렀다. 하읍현은 신라 말기에 폐현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 시대에 곤명현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천[* 행정구역상 주(州)가 아닌 곳은 천(川)으로 글자가 바뀌었다. 사천 외에도 [[인천]], [[포천]], [[영천시|영천]] 등이 그러한 예이다.]현이었다가, 1895년 사천군이 되었다. 곤명현은 1419년 [[남해군|남해현]]을 편입하여 곤남군이 되었다가, 1437년 남해를 다시 분리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편입하여 곤양군(昆陽郡)이 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의해 사천군이 진주군 축동면과 구 곤양군 일원을 편입하였다.[* 구 곤양군 중 금양면, 서면은 하동군에 편입되어 현재의 금남면, 금성면, 진교면이 되었다.] 1895년까지 곤양은 종4품 군수가 관할하는 군이었고 사천은 종6품 현감이 관할하는 현이었는데, 이 때 사천군이 곤양군을 흡수하면서 곤양은 작은 면소재지로 쇠락해 버린다. 1918년 문선면과 수남면이 삼천포면으로 통합되었고,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56년 삼천포읍이 남양면과 합치면서 삼천포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지금 규모나 인지도에 비해 시 승격은 꽤 빨리 이뤄졌다. [[충주시]]랑 승격 동기이고, [[제주시]], [[강릉시]], [[원주시]] 등과 1년밖에 차이가 안 나며, [[울산광역시]], [[천안시]]보다도 시 승격이 빠르다.], 사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사천시로 통합되어 다시 하나가 되었다. 2007년 4월 23일 시청을 용현면으로 이전하였다. [[사천시청|시청]] 위치가 완전 농촌 허허벌판이라 접근성이 극악이다. 사천읍과 구 삼천포시의 중간 지점에 시청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천읍내에 있는 사천군청 청사나 삼천포 시가지 중심에 있는 삼천포시청 청사 한쪽으로 몰아서 쓰기에는 위치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문제가 되고, 청사를 2개 두는 것도 행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물론 지역 갈등을 조장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여수시]]는 [[삼여통합]] 이후 20년 넘도록 통합청사를 못 만들고 청사 3개를 유지하고 있는 탓에 매년 공무원들의 이동시간 낭비 및 헛걸음하는 시민들의 불편과 더불어 지역 간 아귀다툼의 근원이 되고 있다.[[https://www.chosun.com/national/regional/honam/2021/04/24/VY7ZTDKVJZBMHIZIHMJNEFC2OQ/|#]]]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