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숭지 (문단 편집) === 양양 경영 === 사숭지는 양양 지역이 남송 정권에 있어 요충지라는 것을 인지하고, 양양 지역을 중요시하였다.[* [[남송]]을 비롯한 남방에 위치한 정권이 북쪽으로 나아가거나 북방의 진격을 막아내려면 양양의 경영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양이 위치한 남양분지는 동서로 뻗어 남북이 만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동서 싸움이나 남북 싸움이나 남양 분지는 병가가 반드시 다투는 곳이다. 양양은 남양 분지의 남부에 위치하여, 호북에 의지하여, 한수와 장강을 통과하고, 동쪽으로 오회와 접하며, 서쪽으로 파촉에 통한다. 또한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고, 관중에 서쪽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한중을 거쳐 농서쪽으로 연락할 수 있다. 남북대항 당시 남측의 군사방어선은 동서로 3,4천 리에 걸쳐 있었고, 양양은 이 긴 전선의 동남쪽 끝과 서북쪽 끝의 연결 지점에 있었다.따라서 양양은 일방의 요충지로서 양양의 위상은 전역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송과 금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금은 동북쪽에서 왔고, 전쟁책의 근원은 요동이었다. 관롱, 형양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이 서북-동남 방향의 사선과 금병 타격 방향인 동북-서남 방향의 사선이 수직으로 뻗어 있고, 게다가 산과 강의 험지로 남송 왕조의 일시적인 확보가 가능하다. 이 사선은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는데, 연결고리는 장강과 한수, 장강 동쪽으로 오회, 서쪽으로 파촉, 형양거와 연결되어 있다.한수는 한구에서 거슬러 올라가 감숙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이르며 관롱과 동남쪽을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양양은 이 연결선의 연결부위에 위치한다. 이처럼 남송 국방라인에서 양양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순희 연간인 송효종 시기 진량도 양양 지역의 방어를 중시했다. 그리고, 손오 최후의 명장이었던 [[육항]]도 형주의 방어를 중시하였는데, 나중에 [[몽송전쟁]] 시기 [[맹공]]이 육항의 어구를 인용해 양번 지역의 방어를 중시하였다. 또한, 나중에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로 인해 투항하는 [[유정(원나라)|유정]]도, 남송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양양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223년부터 1233년까지 양양 지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였다.[* 일설에는 양양의 지리와 주요 상황을 [[사미원]](史彌遠)에게 암암리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는 양양을 열심히 경영하여, 둔전을 전개함으로써 양양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양초와 병마가 충분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