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북사건 (문단 편집) === 회사의 외면과 어용노조 === >(광부들은) 불평불만을 하면 그날로 해고당했다. 고정된 직장이 아니고 매일 작업배치를 받는데 그날 안 해주면 그걸로 해고 된 것이었다. 노동청에서 구제신청을 받아줘도 회사에서 절대 안 받아줬다. 벌금 물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특히 동원탄좌의 경우 임금인상 시기가 도래하면 '''임금인상의 기준이 되는 3개월 전부터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임금인상분을 상쇄하여 결국 '''임금인상 효과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편법'''을 사용하였다.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후산부로 근무했던 윤0철의 노임지불명세서를 보면 기본금은 임금인상 시기인 3~4월을 기준으로 이전 3개월 동안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결국 3월의 실질 임금인상 효과는 전년 11월 대비 5~11% 내외에 그쳤다. -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보고서 中 상황이 이런데도 회사와 노조는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했다. 회사는 광부들의 임금을 올리거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데 일체 신경을 쓰지 않았고 노조는 이름만 노조였을뿐 사실상 '''[[어용노조]]로서 회사의 [[꼭두각시]]같은 존재'''였다. 우선 회사는 ''''암행독찰'이라는 이름으로 광부들을 감시했다.''' 사장 친인척들로 구성된 간부들이 하루종일 탄광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관찰하며 회사에 보고했다. 얼마나 감시를 철저하게 했던지 "간밤에 부부싸움을 한 것"까지도 다 알았다고 한다. 또 산업재해가 터지면 보상도 별로 해주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해고통지를 하는 등 강압적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광부들이 저임금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도 임금을 올리지 않기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했다.[* 위의 증언처럼 '시간차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을 징계할 때 '30% 감봉'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광부들의 월급 체계는 도급제(광부가 캔 석탄의 양만큼 임금을 받는 제도)였기에 이는 지출하는 돈을 줄이기 위한 [[꼼수]]였다.] 또 어용노조를 전두지휘하여 노동자들의 단결도 저지했다. 어용노조도 심각했다. '''어용노조는 광부들의 요구조건이 아닌 회사의 요구조건을 우선시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하기 전만 하더라도 '노동조합'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거의 다 어용노조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노조가 변질되어버렸냐면 회사가 노조지부장같은 노조 지도부에게 혜택을 마구 주었기 때문이다. 노조원은 안중에도 없는 대신 노조 지도부를 세뇌시켜서 자기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회사의 기만적 행태는 노조지부장 선거에도 나타났다. 노조지부장 선거 전에 대의원 선거를 거치는 간선제 형식이었데, 선출된 대의원들에게는 버스를 보내 관광여행을 시켜주었다. 일종의 회유인 셈인데 그렇게 여행을 즐기게 하다가 선거날에 투표장 앞에 내려놓는 식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조지부장 선거에서는 회사의 공작뿐만 아니라 경찰, 형사, 군수까지 동원되어 개입했다고 한다.] 이렇게되니 노조 지도부로서는 회사에 충성만 하면 되었다. 당시 사북탄광의 노조였던 광산노조 동원탄좌지부의 지부장은 이재기라는 사람이었는데, 1964년 처음 노조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노조지부장을 했었었다. 그런데 이재기는 노조에 있으면서도 광부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간부들만 따라다니며 비위를 맞췄다. 어찌나 광부들에 관심이 없던지 광부들 중 이재기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절반을 넘을 정도였다. 이렇게 노조가 무력화된 채로 회사로부터 조종당하게 되자 '''노조에 대한 광부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