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북사건 (문단 편집) === 늘어나는 산업재해 === >1977 ~ 1982년 각국별 광산 재해 실태(사망자수/1백만 t생산) >서독 0.4명 / 영국 0.6명 / 스페인 1.1명 / 일본 1.36명 / '''한국 8.3명''' >『석탄 산업의 현황』, 1983.5. >1972년 이후 광산 재해 현황 >1972년 : 사망 187명 / 중상 1,647명 / 경상 4,511명 >1973년 : 사망 264명 / 중상 1,579명 / 경상 3,328명 >1974년 : 사망 252명 / 중상 1,742명 / 경상 3,370명 >1975년 : 사망 270명 / 중상 1,945명 / 경상 4,362명 >1976년 : 사망 240명 / 중상 1,937명 / 경상 3,690명 >1977년 : 사망 219명 / 중상 1,896명 / 경상 3,825명 >1978년 : 사망 195명 / 중상 2,074명 / 경상 3,350명 >1979년 : 사망 221명 / 중상 2,270명 / 경상 2,873명 >1980년 : 사망 170명 / 중상 2,436명 / 경상 3,387명 >1981년 : 사망 226명 / 중상 2,809명 / 경상 3,671명 >1982년 : 사망 199명 / 중상 2,545명 / 경상 3,240명 >자료 : 전국광산노조 사업보고서 `72~`83[* 이건 진폐증과 같은 산업재해는 집계하지 않은 것이다. 순수하게 광산내의 사고만 집계한 것.] 석탄 채굴은 전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해외에 고정적으로 수출할만한 효자 품목이었다. 때문에 정권을 가리지 않고, 채탄과 광업은 국가적 주도하에 나날이 생산량이 늘어났으며, 이 석탄 대금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탄을 다 캐내어 폐광이 되는 광산이 늘어났고, 탄맥이 살아있는 광산들도 탄층의 심부화(深部化)로 점점 더 깊이 파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깊이 파들어가면 갈수록 당연히 위험성과 노동강도는 몇곱절로 늘어나게 된다. 때문에 1980년에는 전체 탄광노동자 56,173명 중 총 재해자는 5,885명으로 광부 10명 중 1명이 죽거나 다쳤을 정도로 높은 재해율을 보였다. 이로 인해 당시 탄광노동자들의 이직률은 해마다 급증하여 1977년 이전에는 15% 정도였던 것이, 1978년에는 28%, 1979년에는 32%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렇게 작업환경은 나날이 나빠지는데, 회사는 작업환경 개선은커녕 생산량이 줄어들었으니 임금을 깎거나 체불까지 하는 등 갑질을 일삼는다. 붕괴사고나 진폐증으로 큰 부상을 입은 종업원들이 산재 신청이라도 하려들면 깡패들을 풀어 가족을 협박해서 막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위에 서술된 광산 재해 피해자의 숫자도 매우 축소된 것이다. 대부분의 탄광 회사들은 사망사고가 나면 위로금이란 명목의 푼돈 몇푼을 유족에게 쥐어주고 덮어버리기 일쑤였으며, 가족도 없이 혼자 일하러 온 사람은 그냥 암매장해버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저기에 집계된 인원은 그나마 노조가 명목상으로나 존재하는 제법 큰 회사들에서나 확인된 것이니 그것보다 못한 수많은 소규모 탄광이나 덕대 집단에서 죽은 인원까지 하면 얼마나 될지도 짐작조차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