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북사건 (문단 편집) ===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 >'''산지사방이 일터인데 / 그리도 할 일 없어 탄광에 왔나'''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막장으로 들어간다 - 당시 광부들이 일하면서 부른 <광부아리랑>[* <노동일보>, 2002년 10월 14일자] >사택은 베니다 합판 양쪽에 스티로폼을 중간에 댄 것이 벽이어서 추웠다. 겨울이면 고산지대이다 보니 특히 추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방에다가 연탄난로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로인해 연탄가스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1970년도에는 월급을 쌀로 받았다가 하반기에 들어서 현금으로 받기 시작했다. '''쌀 장수도 회사 사장 친인척이었다. 하질미 팔고서는 값은 같은 가격을 받았다.''' 소비조합은 사북에는 현재 카지노가 있는 지장산 사택과 새마을 사택 두 군데에 20~30평 규모였다. 요즘말로 마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진 돈이 없으니 이곳에서 인감증을 제시하고 가져온 후 월급날이면 공제했다. '''가격이 30%이상 비쌌다.''' 안전장구 시설 장비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회사 측은 안전시설은 도외시하고 탄을 캐는 데만 집착했다. 그 당시 70년대 에너지 파동이 나면서 정부는 '석탄 증산 보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기업주가 어떤 사고를 내도 모든 책임을 광부들에게 떠 넘겼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해발 800m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중략) 산비탈에 옹기종기 서있는 연립식 주택은 10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무척 낡아 있어 2.5km 떨어진 시가지로 나가는 길은 경사 40도의 비탈길로 '''차량통행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슬래브 단층인 연립식 주택 1동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한 가구가 방 2개 부엌 1개(8평)'''로 구조가 똑같으나 수리를 하지 않아 벽과 천장이 허물어져 물이 새고 수도도 설치되어 있으나 겨울철이면 물이 나오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욕탕은 1개로 그나마 여자용은 없어''' 주부들이 시가지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 <신아일보>, 1980년 5월 3일자 기사 사북읍[* 1980년 초 기준으로 약 5만 명의 시민이 거주하고 있었다.]의 사북탄광은 동원탄좌[* 1962년 '원동탄좌개발(주)'로 시작하여 1963년 '동원탄좌개발(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민영광산회사로서 사북탄광 등을 경영했다. 이 회사는 지금 [[http://dongwoncorp.com|'(주)동원']]이라는 이름의 자갈채취업체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참고로 대기업 [[동원그룹]]과는 아무 관련 없다.]의 관리 아래 있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민영광산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던 곳이었다.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였던 이 곳은 대한민국 석탄생산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했다. 하지만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노동환경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30~40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고난도의 노동을 해야 했다. 탄광이라 산업재해도 자주 발생하여 광부들의 목숨은 늘 위태로웠고, 탄광 속의 짙은 석탄가루는 광부들의 폐를 [[진폐증]]으로 망가뜨렸다. 그런 환경인지라 광부들의 노동은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북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월급은 '''월평균 15만 5천원에 불과'''했다.[* 현재가치로는 약 150~200만원 상당이다.] 1980년의 물가가 라면 100원, 버스비 100원, 소주 200원, 자장면 500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적은 월급이었다. 물론 이들이 목숨을 걸고 탄광에 들어가기 때문에 위험수당을 더 받기는 했으나 탄광촌의 물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급여의 산정 역시 회사 제멋대로였다. 광부들의 급여에서 기본급은 매우 낮고, 생산량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데 광부들이 탄을 10톤을 캐서 실어나오면 '부비끼'라고 하여 회사 소속의 검탄원[* 이들은 대개 회사 사장이나 간부들의 자식, 친인척들이었다.]이 눈짐작으로 탄을 평가해서 일부러 탄의 등급을 낮추어 잡거나, 탄에 이물질이 많이 섞였다면서 생산량을 6톤이나 7톤으로 매기는 짓을 했다. 임금이 그랬으니 가족들의 삶도 고달팠다. 당시 사북탄광은 사북읍 지장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산간지역이라 물자수송도 어려워 물가가 다른 지역보다 더 높았다. 상수도 시설은 거의 보급 되지 않았고, 고지대라서 지하수도 얼마 없었다. 거기에 광산의 특성상 얼마 있지도 않은 지하수조차 이리저리 탄맥을 뚫다 보면 끊겨버려 사북에서 제일 귀한 게 돈이 아니라 물이라고 할 정도로 물이 없어 힘들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광부들은 탄광에서 탄가루에 범벅이 되어 새까맣게 되어도 씻을 물조차 제대로 없어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아내며 살았다고 할 정도이다. 한 광부가족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70년대 입주한 지장산 사택은 세탁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짐승처럼 살았다."'''고 말했다.[* <노동일보>, 2003년 1월 23일자]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01023|당시 사북탄광지역 사택모습]] 또 사택이라고 있는 집 역시 벽이 너무 얇아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할 정도였고, 거기다 날림으로 지어 너무 추웠다. 집에는 화장실조차 없어서 30가구 당 푸세식 공동화장실 1개꼴로 사용했는데, 대변을 볼 수 있는 칸은 4칸도 채 안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만 하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정부 각료의 입에서 언급될 정도'''였다는 걸로 알 수 있다. 사건 1달 전인 1980년 3월 14일 오전 10시에 열린 계엄위원회 19차 회의에서 내무부 차관 [[서정화(1933)|서정화]]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주택 및 급수시설을 포함한 생활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인데다 요즈음은 체불노임 때문에 이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다. 광산에서는 이러한 광부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덕배"라는 폭력조직까지 동원하고 있다. 원성이 집단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체념적인 이들의 원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