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물놀이 (문단 편집) == 역사 == 본래 [[풍물놀이]], 혹은 [[농악]]은 한국의 농경문화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전통 연희문화였다. 일반 농촌의 민중들은 풍물놀이를 통해 각종 촌락 제의(祭儀)에 활용하거나 유희 수단으로 삼아 마을 차원의 결속력을 다졌다. 또 조선 후기에 성장한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 역시, 여러 연희 과장 가운데 풍물놀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통사회에서 풍물놀이를 전승하는 두 축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촌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점차 사양(斜陽)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정부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내세우며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했고,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해 전통문화 보존에 뛰어들었다. 김용배는 이를 두고 '무형문화재'라는 제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승되어야 할 전통 문화를 제도권의 틀에 가두어 버렸다고 하였고 이를 김덕수가 인용한 바 있다. 풍물놀이 역시 1966년, 무형문화재로 포함되었다. 1966년 당시, 최초로 지정된 풍물놀이는 진주삼천포농악.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풍물놀이는 진주삼천포농악 외에 평택, 이리, 강릉농악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들은 전부 1985년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풍물놀이는 일반 촌락에서 행해지던 마을굿만이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그보다 2년 전 [[남사당놀이]]가 지정되었으나, 당시 남사당놀이는 꼭두각시 과장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60,70년대를 겪으면서 이미 농촌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쇠퇴하던 풍물놀이가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이미 일제강점기 말기의 전시체제,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농촌의 인구는 타격을 입었고, 풍물놀이 역시 '여성농악단'과 같은 '순회 공연 단체'에 의해 전담되다시피 하면서 농업사회의 기층문화가 아니라 '유랑예인집단에 의해서 연희되는 오락'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은 [[풍물놀이]]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70년대와 80년대 청년대학생 및 운동권 지식인 사이에 민족문화재발견의 바람이 불었고 일부 젊은 국악인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보이면서 다양한 시도를 접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를 뒤흔든 또 하나의 문화운동인 '소극장 운동'과 접목되면서 마침내 '민속악회 시나위'라는 집단이 창설되었다. 지금의 국립전통예술학교 출신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중심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박범훈'. 이들은 각종 민속 음악을 무대화 하기도 하고 민속 음악을 배경에 둔 창작 활동도 벌였고, 그러한 산물들을 선보이는 자리로 정기 음악회를 열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 사물놀이가 태어났다. 1978년 2월,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 연주회에서 김용배(당시 '민속악회 시나위'의 객원 멤버),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이상 민속악회 시나위 단원) 등 네 사람에 의해 '웃다리 풍물 앉은반'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처음 연주되었다. 당시에는 '사물놀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고, 연주자 또한 꽹과리의 김용배와 장구의 김덕수를 제외하면 전통 연희 종목의 전공자가 아니었다. 당시 연주에 참여했던 최태현은 해금 전공이었고, 이종대는 피리 전공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23586.html|참고자료]] 2004년 1월 23일 방송된 KBS의 '인물현대사' 29회 김덕수편에 나온 진술에 의하면 78년 2월의 연주는 김용배가 제안하여 급하게 시연한 연주라고 한 바 있다. 이 때의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전통 연희'를 위한 연주팀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2월 공연에 참여한 김용배를 중심으로 김덕수, 최종석과 최종실 두 형제가 가세하였다. 그 가운데 나이가 많았던 최종석이 빠지고 대신 이광수가 영입되었고, 최종적으로는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을 단원으로 하는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연주단이 12월에 창설되었다. 바로 이들로부터 현대와 같이 중부지방의 가락을 엮은 웃다리 사물, 영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영남사물, 호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호남 우도, 호남 좌도 사물, 이 삼도의 가락을 모두 엮은 삼도 사물이 나오게 되었다. 마당에서 진을 짜고 어우러지는 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길놀이를 중시하던 기존 풍물놀이와 달리, 사물놀이는 한정된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것을 전제로 편성되었다. 마을과 길에서 공연하는 풍물패를 즐기는 것이 아닌, 객석에서 무대위의 연주를 듣는 사물놀이로 재탄생한 것이다. 또한 기존 풍물놀이의 가락들을 정리하여 4개의 가락으로 집대성하였다. 이들이 점차 대중화 되면서 이들의 팀 명이었던 사물놀이가 하나의 장르명으로 바뀐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