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천 (문단 편집) === 말년 === 《[[태사공서]]》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한서 사마천 열전에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한서에는 사마천의 최후를 서술한 부분이 없다. 위에 서술된 보임안서 편지가 끝나고 바로 다음 줄에서 사마천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보임안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거나 또 간언을 하다 심기를 거슬러 투옥되어 무제 말년이나 소제 초년에 옥사했다는 주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통성 있는 황제가 내린 명령, 특히 누군가를 처형하라는 명령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여겨져서 기록을 빼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과, 한서 열전 수록 인물 중에서 사마천 딱 1명만 사망 원인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토대로 무탈하게 생을 마쳤을 거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하고 작은 규모로 장례를 치렀다면 역사에서 잊히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중국의 사기 연구자인 [[천퉁성]]도 사마천의 말년이 비교적 평안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당했던 형벌과 그 형벌을 받은 연령을 생각하면 말년에 군주로부터 큰 핍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형벌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려서 다른 귀족들보다 당시 기준으로도 말년에 더 고생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여담으로, 정통성 없는 군주가 내린 명령을 기록에서 빼 버린 경우로는 [[공자]]가 지은 [[춘추]]가 있다.] 그의 사망년도 또한 정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86년 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마천의 고향이라는 섬서성 한성시에는 그의 후손들인 동(同)씨와 풍(馮)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마(司馬)라는 성이 아니어서 이상할 듯 하지만 동(同)은 사(司), 풍(馮)은 마(馬)를 변형한 것인데 이것은 사마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는 자살설을 비롯해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후손들은 사마천이 상기 행적 이후 또 한 번 황제를 비판해 노여움을 사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일족들은 성씨를 둘로 나누어[* 후대에 제갈씨들이 성씨를 제씨, 갈씨로 나누어서 사용한 경우와 비슷한 경우로 보면 될 것이다.] 사(司)씨, 마(馬)씨, 아니면 성씨 한자를 변형시켜 동(同)씨, 풍(馮)씨 등으로 바꾸면서 숨어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히 먼 후대에 와서야 사마천의 후손으로 다시 공인되었기 때문에 가문의 역사에 비해 대수가 상당히 적다. 《태사공서》가 걸출하긴 하지만 후한시대까지도 방서(謗書), 즉 정부를 비방하는 위험한 책으로 불렸다는 점, 그리고 한무제의 까탈스러운 성격만 보더라도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장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안 된 전한 말기에 저소손이 여기저기 내용이 빈 곳을 땜빵했던 점을 봐도 초기의 사기가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 전한 말기에 세상에 나와 <태사공서>를 면학하고 초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며, 다행히도 지금까지 <태사공서>는 전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